【고양스토리】 죽은 자의 원, 산 자의 원

_서오릉과 월산대군묘

유성문 주간 승인 2021.05.15 17:15 | 최종 수정 2021.05.10 15:55 의견 1

서울에서 고양으로 들어서면 들머리부터 파주에 이르기까지 무덤으로 가득하다. 서울 서북쪽과 경계를 이루는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을 필두로 서삼릉과 고려공양왕릉, 월산대군묘, 공순영릉 같은 크고 작은 음택들과, 용미리 언덕바지에 지천으로 누워있는 백성들의 묘가 즐비하다. 벽제화장장을 비롯하여 속속 들어선 공원묘원들 역시 가루로라도 망자의 세상을 거든다.

그 기점이 되는 서오릉은 총면적 1,829,792㎡(55만여 평)에 5능(陵) 2원(園) 1묘(墓)가 들어서있는 동구릉에 버금가는 조선왕릉 능원이다. 서울 구산동사거리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인데다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인근 주민들이 아침저녁 산책코스로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익릉은 조선 제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서오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능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좋다.


서오릉에서는 특히 조선 궁중여인네들의 한 많은 삶을 만난다.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가 누워있는 수경원이 그러하고, 손자인 연산군의 학정을 나무라다 그의 머리에 받혀 죽은 소혜왕후가 잠든 경릉이 그러하고, 장희빈에 밀려 폐위되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다시 복위되었으나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만 인현왕후가 묻혀있는 명릉 또한 그러하다. 저마다의 사연은 고스란히 역사 뒤안의 처연한 스토리이지만, 그 중 가장 압권은 아무래도 장희빈이 묻혀있는 대빈묘(大嬪墓)다.

서오릉 대빈묘. 남성권력에 의지해 신분상승을 꾀했으나 결국 그 권력으로부터 처절하게 버림받은 한 여인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망주석이 소슬하다. 대빈묘 상석에는 가끔 누군가 꽃다발을 놓아두고 간다고.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을 통해 신분상승을 이루었으나, 다시 남성에 의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만 한 여인의 주검은 애초 광주군의 산야에 버려진 듯 묻혀있다 1970년이 되어서야 서오릉으로 이장되었다. 말이 이장이지 그녀의 무덤은 왕릉의 본역을 구획하는 울타리 경계선에 초라하고 옹색한 몰골로(다른 능역에 비하면) 겨우 달라붙어있는 형국이다.

더구나 그녀가 누운 곳의 반대편 명릉에는 그녀의 지아비였던 숙종과 라이벌이던 인현왕후가 나란히 누워있고, 그 한쪽에 제2계비였던 인원왕후의 능침마저 자리하고 있으니 멀찍이 그를 지켜보아야만 하는 폐빈의 심기는 과연 어떠했을까. 그렇게 해서라도(아들 경종이 묻혀있는 의릉 곁이 아니라) 연을 잇게 해준 후인들의 처사를 잘했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월산대군묘는 조선시대 대군묘(大君墓)의 대표적인 예이다. 매우 큰 봉분 앞에는 비, 그 앞에 상석, 상석 앞에 장명등, 양 옆으로 한 쌍의 망주석, 그 옆으로 문인석이 한 사람씩 서 있다. 문인석의 표정이 마치 주인의 심경을 대변이라도 하듯 처연하다.

서오릉에서 서삼릉과 공양왕릉을 돌아 낙타고개를 넘어가면 새로 뚫린 길 밑에 어렵사리 버티고 있는 월산대군묘를 만난다. 묘 앞에서는 얼핏 한 기의 무덤으로 보이나, 봉분 뒤편을 돌아들면 놀랍게도 앞에서는 보이지 않던 또 다른 무덤이 나지막이 숨어있다.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의 무덤이다.

월산대군은 정략에 의해 동생 성종에게 왕위를 내준 뒤 은둔생활로 여생을 마쳐야 했지만 정작 더 큰 치욕은 사후에 벌어진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이 홀로 살던 부인 박씨를 범하여 끝내 자결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월산대군의 묘는 특이하게도 북향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궁궐을 마주하기조차 싫었던 까닭일 것이며, 자신의 무덤 뒤로 부인의 무덤을 감춰두고 있는 것도 지어미의 치욕을 안간힘으로 막아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망자의 ‘원(怨)’이 아니라 망자를 바라보는 산 자의 ‘원(願)’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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