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 아벨을 위하여

_5월 광주

유성문 주간 승인 2021.05.12 18:27 | 최종 수정 2021.05.12 18:31 의견 2

구원을 외치며 새벽 거리를 달리던 네 형제 아벨을 위하여, 끝끝내 열리지 않는 너희 집 대문 앞에서 허물어져버린 그의 통곡을 위해, 빗장을 걸어 잠그고 이불 속에 드러누워 그의 외침을 부인하던 너와, 그리고 더 많은 네 이웃들을 위해 내, 너로 하여금 벙어리 자식을 낳게 해주마…. -임철우 <봄날> 중에서

어느 적의 충장로. 사진 속의 여학생들도 이제 애기엄마가 되었을까. ⓒ유성문(2006)

2017년, 새 대통령은 37주년 5·18기념식장을 찾아 감격스럽게 ‘5·18둥이’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산 자여 따르라’가 ‘제창’되었다. 그로써 ‘산 자’의 부채의식은 소멸되었는가. 사실 5월이면 무슨 의례인 양 어김없이 광주를 찾는 것처럼 몰염치한 짓은 없다. 그리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 그날의 기억조차 이제는 가뭇할 뿐이다. 그때 거리를 달리던 젊음들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겼고, 이제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자라나 제세상인 양 거리를 활보한다. 그때 ‘벙어리 자식을 낳게 하리라’던 약속 때문일까. 아이들은, 아니 세상은 더 이상 그때의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하더라도 짐짓 시늉일 뿐이다.

그 ‘봄날’ 이전부터 이미 그러했지만 충장로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룬다. ‘젊음과 패션의 거리’라는 이 거리는 광주의 명동이요 광주의 동대문이다. 밀리오레를 중심으로 한 크고 작은 패션몰들, 구시청사거리의 보세거리는 최첨단의 의류, 잡화, 가방, 신발, 액세서리들로 넘쳐난다. 그날 충장로로 금남로로 거리에 나뒹굴던 신발이거나 가방, 피 묻은 손수건과 도시락은 누구의 것이었던가. 이 거리의 휘황한 빛은 마치 그날의 기억을 지워내기라도 하듯 공연히 번쩍거리고, 아이들은 그 허황한 빛 속을 뛰어다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빛마저 지고나면 비로소 광주의 여명이 온다.

서석대 너머로 장불재의 긴 그림자가 무등을 그린다. ⓒ유성문(2006)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서정주 <무등을 보며> 중에서

무등을 오른다. ‘무유등등(無有等等)’ 무등산을 오른다. 산장길을 따라 꼬막재 넘어 규봉암 지나, 지공너덜에서 잠시 쉬어 장불재의 긴 능선마저 타고 넘으면, 마침내 입석대와 서석대. 채 지지 않은 연분홍 철쭉에 가슴이 아리다. 돌기둥 위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라. 무한겁겁(無限劫劫) 능선은 아득히 떨어져 내리고 그 아래가 바로 ‘빛고을’이다. 아니 고을이 산이고 산이 이미 빛이다. 참새 소리조차 귓불에 담을 만큼 산은 넉넉하건만 장불재를 넘어오는 저 고단한 그림자는 또 무엇인가. 무등을 오르기가 그토록 힘겹기라도 하단 말인가.

내려서는 길은 중머리재를 거쳐 증심사(證心寺)에 이른다. 흙으로 빚은 오백나한, 뒤란의 소슬한 대숲, 이 절은 도시 어떤 마음을 드러내려는 것일까. 모른다. 우리가 모른 척했던 세월, 슬며시 지워버리려 했던 기억, 다시는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얼굴들. 아니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바람처럼 흩어졌어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어떤 마음 하나까지도 나는 애써 모른다. 그냥 사하촌의 오래된 보리밥집 평상에나 나앉을 일이다. 거기 서걱이는 보리밥에 헛헛한 뱃구레나 채울 일이다. 아릿한 고추장에 공연한 땀이나 흘릴 일이다.

풍암정. 옛 ‘지옥 속의 낙원’은 이제 한낱 ‘유원(遊園)’이 되었다. ⓒ유성문(2006)

400년 후에 자전거를 타고 온 한 후인의 눈에 이 정자들과 낙원의 서늘함은 불우하다. 소쇄원·식영정뿐 아니라, 다른 많은 정자들도 그 불우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불우한 자들이 낙원을 만들고, 모든 낙원은 지옥 속의 낙원이다. -김훈 <자전거여행> 중에서

무등산 자락을 따라 다시 북쪽으로 길을 잡으면 담양의 그 서늘한 대숲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정자를 만난다. 금곡동의 풍암정, 충효동의 환벽당과 취가정, 이윽고 담양 땅에 들어서면 노회한 송강의 마을에 자리한 고랫등 같은 한국가사문학관을 기점으로 소쇄원과 독수정, 식영정이니 명옥헌이니 송강정이니 면앙정이니 줄줄이 현실에서 패퇴한 자들이 세운 낙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지옥 속의 낙원’에서 여전히 ‘사미인곡’에 ‘속미인곡’까지 불러제끼며 은둔이 아니라 노출을 꿈꾼다. 하여 나의 발걸음은 기어이 부질없는 낙원이 아니라 망월동으로 꺾이어든다.

거기 잊혀진 역사는 이제 신화로만 남아있다. 번듯한 조형물들 덕에 한갓진 구 묘역은 더욱 어둑해 보인다. 눈물의 소녀들이 남기고 간 종이학은 바랠대로 바래고, 항쟁의 기록들은 비에 젖어 눅진하다. 아직 죽음은 끝나지 않았는가. 패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날은 어둡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국립5·18민주묘지. 그 공식 명칭보다는 여전히 ‘망월동묘지’로 불리고, 그 편이 훨씬 어울린다. ⓒ유성문(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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