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물고기】 1-바다를 건너는 법
얕은 물에는 큰 고기가 놀지 못한다
혜범 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1.06.01 00:00 | 최종 수정 2021.06.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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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절에 사는 학인(學人)이 하루는 절 위의 동암(東庵)에 올라가 큰스님을 뵙고 넙죽 세 번 절을 올렸습니다.
학인: 법(法, dharma)의 큰 바다(大海)는 믿음(信 믿을 신, Glauben croire believe)을 가지고 들어가고, 지혜(智 지혜 지, Weiss la sagesse wise)를 가지고 건너간다 했습니다. 노사(老師)는 어떻게 이 바다를 건너오셨는지요?
노사: 지금 ‘이 바다, 저 바다를 어이 건너느냐’를 묻는 게냐? 나는 믿음도 없고 지혜도 없으니 그런 건 서암(西庵)에 가서 물어봐라.
학인: 큰 바다의 파도를 이기려면 어찌해야 하는지요?
노사: 구두선(口頭禪), 일단 서암에 먼저 다녀오거라.
학인은 동암에서 차도 한 잔 얻어먹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하여, 괴로움과 번뇌를 안고 서암으로 향했습니다. 이윽고 서암에 올라가 큰스님을 뵙고 넙죽 세 번 절을 올렸습니다.
학인: 법의 큰 바다는 믿음을 가지고 들어가고, 지혜를 가지고 건너간다 했습니다. 노사는 어떻게 이 바다를 건너오셨는지요?
노사: 동암에 갔던 모양이로구나. 먼 바닷길. 그래 차는 얻어먹었느냐?
학인: 차를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노사: 빈손으로 갔던 모양이로구나. 그럼 나도 그대에게 차를 내어주지 못하겠구나. 내려가 공부를 더 하고 먼저 마음을 열고 내일 다시 오너라.
학인: 내일까지 갈 게 뭐 있겠는지요?
학인은 노사의 교자상(交子床)에 놓인 빈 물 주전자를 들고 나와 공양간을 물었고, 샘의 물을 떠 물을 데운 후 서암의 큰스님 방으로 향했습니다.
학인: 스님 찻물 떠왔습니다.
노사: 그래 이 찻물이 물이냐, 파도냐?
학인: …….
노사: 얕은 물에는 큰 배를 댈 수 없는 법. 내려가거라. 다음에 다시 오너라. 동암에서 차를 얻어먹지 못한 놈이 감히 어디서, 떼끼, 이놈! 설함이 있음과 설함이 없음을 모르는 이 담판한(擔板漢) 놈아.
학인은 '담판한, 담판한'하며 터덜터덜 서암에서도 쫓겨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혜범 스님은 1976년에 입산했다. 현재 강원도 원주 송정암에서 수행하고 있다. 1991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바다, 뭍, 바람>으로 등단했다. 1992년 <언제나 막차를 타고 오는 사람>이 영화화되었으며, 1993년 대전일보에 장편소설 <불꽃바람>을 연재했고, 1996년 대일문학상을 수상했다. 최근 문학세계사에서 <소설 반야심경>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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