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 치욕과 수치

_모란장에서 허난설헌묘까지

유성문 주간 승인 2021.06.04 01:20 의견 0

모란장 ⓒ유성문(2006)

마이너리그에서만 유명한 58년 개띠는/ 잠시 대기석의 동료들을 바라본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이미 슬픔 따위는 없다/ 치욕조차 없으니 그들도 나를 외면한다/ 나는 그래도 네 발로 기지는 않았다/ 용변을 볼 때마다 한쪽다리를 쳐들지도 않았다/ 꼬리를 흔들며 납작 엎드리지도 않았고/ 아무나 보고 올라타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쨌냐고, 별 이상한 개 다 있다고/ 놈들은 여전히 나를 외면하고/ 이제 마이너리그에서도 밀려버린 58년 개띠는/ 더 할 거짓말이 없어 그냥 멋쩍었다 -졸시 <모란장의 개> 전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 장구경이라지만 예전, 모란장에서 나는 그놈의 견공들 때문에 자꾸만 쭈뼛거렸다. 뙤약볕에 나앉은 그들의 등 위로 떨어지는 철망의 그림자는 음산하다. 불현듯 언젠가 모 방송사와 B.B(브리지도 바르도)가 벌였던 난데없는 ‘개고기논쟁’을 떠올렸다. 그 논쟁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남의 나라 식문화(食文化)를 자기 잣대로 왈가왈부한 육체파 B.B는 그렇다고 치고, 그것을 ‘프랑스인도 개고기를 먹느냐 아니냐’로 맞받아 간 것은 더욱 가관이었다. 아무튼 개고기를 먹는 것을 이해는 하되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나는 철망 안의 예비 개고기들에게 묻는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느냐고. 개들은 말이 없다.

남한산성 ⓒ유성문(2006)

더 예전, 1637년 인조가 당한 치욕이 어떠하든 보통의 행자는 공원입장료 2000원을 떼이지 않으려고 30분 안에 허겁지겁 남한산성을 넘었다. 그 사이 길옆에 나앉은 동문 정도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재였다. 남벽수계곡조차 스치듯 지나치면 비로소 ‘단순통과자’로 분류되고, 돈을 돌려받는다. 돈은 돌려받았으되, 남한산성에 들어앉은 그 깊은 치욕의 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 기회는 놓쳐버린다. 그러고도 얼추 퇴촌을 돌아 분원리 쯤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붕어찜 한 접시에 땀을 빼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길은 생각 밖으로 심각하다. 앵자봉 아래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다. 조선말 젊은 유신(儒臣)들은 천진암에 은거하며 서학에 경도되었다. 강 건너 능내마을에 살던 다산 정약용 형제를 비롯한 일단의 젊은 지식인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으나 핍박받았고, 분열되었으며, 마침내 일부는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는 사이 천진암 승려들은 단지 그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참수당하고, 절은 폐사되었다. 그 아이러니 위에 지금 한국 천주교회는 무려 100년에 걸친 대대적인 성역화작업을 벌이고 있다.

나눔의 집 ⓒ유성문(2006)

원댕이마을 나눔의 집은 하나둘 스러져가는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로 해서 이제 바라보기조차 안쓰럽다. 그 잘난 남자들 탓에 평생 씻기 힘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그들이건만, 잘난 후손들은 그 상처 위에 소금이나 뿌려대기 일쑤였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슬픔을 감싸줄 수 있는 건 그나마 모성일 뿐이다. 지월리의 허난설헌 무덤은 그래서 더욱 구슬프다. 조선에서, 여자로, 그것도 한 남자의 지어미로 태어난 것을 통탄했던 그녀의 무덤은 한쪽 어깻죽지로 두 애기무덤을 그러안고 있다.

허난설헌묘 ⓒ유성문(2006)

지난해 잃은 딸과/ 올해에 여읜 아들/ 울며 울며 묻은 흙이/ 두 무덤으로 마주 섰네/ 태양 숲엔 소슬바람/ 송추에는 귀화도 밝다/ 지전으로 네 혼 불러/ 무덤 앞에 술 붓는다 –허난설헌 <곡자(哭子)> 전문

허난설헌의 무덤이 그러안고 있는 것은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들의 무덤만이 아니다. 유택 앞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너머 원댕이마을처럼, 현실에서 패퇴한 남자들 뒤에서 치욕으로 스러지는 이 땅 여성들의 깊은 한숨까지도 그렇게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겨우 위안의 실낱을 붙잡으려는 나는, 남자라서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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