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스토리】 화해와 치유는 아직도 멀기만 한가

_금정굴 이야기

유성문 주간 승인 2021.06.29 01:00 | 최종 수정 2021.06.29 01:03 의견 0

이날 이미 몇 명의 경찰관들이 금정굴 현장에서 총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전 11시경 이송 행렬이 산 중턱에 도착하자 산 위의 경찰들이 산 중턱의 경찰과 태극단원들에게 주민들을 다섯 명씩 끌고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끌려온 주민 다섯 명을 수직굴인 금정굴 벼랑에 입구를 바라보며 꿇어앉힌 후 다섯 명의 경찰관이 뒤에서 이들의 머리 등에 조준사격을 가했다. 양손이 묶인 희생자들은 총격의 충격에 의해 17미터 깊이의 굴 안으로 떨어졌다. 두 명의 손목이 함께 묶인 희생자들은 총격이 없었어도 총격을 당한 희생자와 함께 떨어졌고, 어떤 이들은 총소리만으로도 놀라 떨어지기도 했다. 그 후 경찰과 태극단은 금정굴 속으로 흙을 뿌려 희생자들의 시신을 덮었다. 총격에 의해서였든 떨어진 충격에서든 목숨을 잃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날 이경선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난 후 이런 기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금정굴에 갔는데, 나는 지리를 모르잖아. 산속으로. (지도를 그리며) 문산 가려면 금촌 지나서 가야 하는데 얼마 가다가 이쪽으로 들어가더라고. 그래서 나는 문산 길이 이쪽으로 있는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산이 있고, 이렇게 산이 있었어. 계곡으로 들어간 거야. 전부 앉혀놨어. 우리는 총 메고 있고. 겨냥할 것도 없지. 가지고 다니는 거니까. 경찰이 먼저 올라갔었던가봐. 누가 내려오더니 경찰이 다섯 명 데리고 올라오라고. 태극단원들도 몇 올라오라고. 나도 쫒아 올라갔어. 태극단원도 몇 사람 올라갔어. (올라갔더니 경찰이 희생자들에게) ‘하나 둘 셋 넷 다섯. 꿇어앉아!’ 그러더니 경찰관들이 등 뒤에서 쐈거든. 우리는 깜짝 놀랐거든. 문산으로 보낸다더니 여기서 사람을 죽이는구나. 그때 당시 빨갱이는 당연히 죽는 걸로 알았어. 그래서 여기서 살상을 다 해버렸다고. 현장까지 갔으니까. 내 눈으로 봤으니까. 전화선, 밧줄로 엮어. 확실히는 모르겠어. 밧줄은 썩어 없겠지. 삐삐선만 남았겠지.”(금정굴 학살현장에 있었던 태극단원 이순창)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억울하지만 아버님의 시신이나마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즉시 작은아버님과 함께 반장을 보셨던 동네 어른들 7명과 금정굴로 달려갔습니다. 밧줄과 사다리, 마차 바를 가지고 갔습니다. 이때가 점심때 즈음이었습니다. 밧줄을 이용해서 작은아버지와 동네반장 어른, 두 분이 내려가셨습니다. 두 분이 내려가시자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듣고 보니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이경선 씨입니다. 우리가 꺼내주자마자 바로 고봉산 쪽으로 도망갔습니다. 나중에 이경선 씨 사위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이경선 씨는 뺨에 총알이 스치는 상처만 입었다고 하더군요. 작은아버지가 내려갔다 오시더니 그냥 피비린내 나고 생명이 덜 끊어져 살려달라고 악을 쓰는 사람, 팔이 떨어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올라왔다고 합니다. 흙이 조금씩 덮여 있었고요. 비록 시간은 점심때였지만 굴 안은 캄캄했고 비좁아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디 시신을 옮길 수도 없었어요.”(금정굴사건 희생자의 아들 이병순)

-신기철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도서출판 자리, 2011)에서 발췌

<항아리가 지켜준 아이>에 수록된 박건웅 작가의 그림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200여 명에 이른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고양시 금정굴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은 국가폭력에 의한 제노사이드(genocide, 국가, 인종, 민족, 종교 따위의 차이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적군 부역자를 색출 처형한다는 미명 아래 부역 사실도 확실치 않은 민간인들이 정식 조사나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고, 남은 유족들은 사실규명이나 보상은커녕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온 낙인과 편견 속에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근래 들어 진상규명과 위령사업을 위한 움직임이 일었지만 숱한 난관에 부딪쳐야만 했고,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국가책임하의 불법학살로 인정하고 법원도 유족에게 국가배상을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정굴사건’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있다.

◆ 200여 명에 이르는 학살에도 처벌 경찰·치안대원 없어

해방 이후 고양지역에서도 남한 여느 지역에서처럼 좌우대립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개시 3일 만에 고양지역이 북한군에 넘어갔으나, ‘아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라’는 라디오 방송을 믿고 피난하지 않은 주민들이 많았다. 지역에 들어온 북한군은 인민재판을 벌여 우익인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북한군은 7월 5일 고양군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한 후 선거를 통해 인민위원을 뽑았고, 주민들을 인민의용군으로 징집하기도 했다. 훗날 ‘금정굴 학살사건’의 단초였다.

같은 해 9월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진 이후 9월 20일에는 능곡이, 9월 28일에는 일산이 수복되었다. 그 사이 고양 일대는 인민위원회 등이 해산되고 혼란스러운 상태가 계속되면서 좌·우익 간 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국군이 고양지역에 진입한 이후 부역자들을 색출하는 일이 시작되었고, 인민위원장 등 일부 부역자들이 사살되었다. 10월에는 복귀한 고양경찰서가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여기서 누가 부역자인지 가려내는 건 당사자가 아닌 이상 정확히 알 수 없었기에 주민들이 고발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탄현동 황룡산 기슭의 금정굴 이정표

고발이 잇따르면서 숱한 부역혐의자들이 연행되어 각 경찰서 지서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고문 또한 빈번히 행해졌다. 이후 경찰에서는 임의로 이들을 분류해서 몇몇은 석방하고 몇몇은 금정굴로 끌고 갔는데, 이 과정에서 우익 치안대와 태극단도 가담했다. 탄현동 황룡산 자락에 위치한 금정굴은 자연동굴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금 채굴을 위해 수직으로 파놓은 굴이었다. 처형은 처음에는 굴 앞에 주민들을 세워놓고 총으로 쏘아 떨어뜨렸으나 생존자가 나타나자 이후엔 굴 입구에서 총살한 후 굴 속으로 던져놓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20여 일에 걸쳐 학살이 이어졌다. 희생자들은 심사를 받는 줄 알고 금정굴 아래 공터에 모여 있다가 경찰의 지시에 의해 5~7명씩 현장으로 올라갔으며, 한 번에 20~40명씩, 많게는 47명까지 끌려갔다고 한다. 또한 부역혐의자들의 가족 역시 학살의 대상이 되었고, 이들의 재산 또한 경찰에 의해 강제 탈취되었다. 학살은 10월 말에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개입하면서 중단되었고, 이후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의용경찰대원과 시국대책위원장 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치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이무영 당시 서장을 포함해 처벌받은 경찰관도 치안대원도 없었다.

◆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과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의 설립

묻혀있던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90년 고양시민회장 김양원이 향토사 발굴 도중 금정굴 학살 사실을 접하면서였다. 같은 해 첫 조사를 실시했고, 1993년 들어 고양시민회, 전교조, 항공대총학생회 등 5개 시민사회단체가 ‘금정굴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결성, 진상규명운동을 시작했다. 뒤이어 유족회도 꾸려져 첫 위령제가 열렸으며, 1995년 9월부터 유족들이 스스로 현장발굴을 개시하여 시청 녹지과 공익요원들의 방해 속에서도 153구의 유해를 발굴해냈다. 이 사실은 MBC <PD수첩> ‘분단비극의 현장, 금정굴 열리다’ 편에서 다뤄진 이후 여러 언론에 보도되었으나 시 당국과 정부는 진상규명에 소극적이었으며, 태극단 출신들도 학살 희생자들이 북한군 부역자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99년 경기도의회는 ‘고양시 일산 금정굴사건 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금정굴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내면서 금정굴사건이 경찰의 주도로 다수의 민간인을 불법 살해하여 암매장한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태극단동지회와 각 보훈단체들이 금정굴 희생자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자 2001년 시 당국은 위령사업을 거부했고, 2002년 ’금정굴 위령사업 촉구결의안'도 부결시켰다. 그럼에도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희망을 다시금 얻었고, 2006년 동 위원회는 금정굴사건에 대해 경찰책임하의 불법학살로 인정했다. 이후 고양경찰서에서 유감과 애도의 뜻을 표명하고, 법원도 금정굴 유족에게 국가배상을 판결했다. 2013년에는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이 설립되었다.

금정굴 학살사건 현장

발굴된 희생자 유해들은 한동안 안치할 곳이 없어 서울대학교병원 법의학교실에 보관해오다 2011년 고양시 청아공원 납골당으로 옮겨졌고, 이후 계약기간 만료로 2014년 하늘문공원 납골당으로 다시 옮겨졌다. 2010년 새로 당선된 고양시장 측에서는 금정굴 유해를 안치하고 평화공원을 조성한다고 했지만 태극단 출신들과 보수단체 등의 반발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고, 2014년 유해를 청아공원에서 하늘문공원으로 이장할 때도 고양시 측은 2,000만원의 예산을 상정했다가 당시 여당에 의해 전액 삭감되고, 이후 표결에 따라 절반 금액으로 정해지는 일도 있었다. 2015년 7월 ‘금정굴 희생자 지원조례’가 다시 고양시의회에 상정되어 보수 보훈단체들의 반발을 물리치고 2018년 8월 고양시의회에서 최종 통과되었다.

◆ 이념적 갈등 떨치고 화해와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야

금정굴사건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다. 2020년에는 금정굴사건의 비극을 유족들의 목소리로 담아낸 소책자 <항아리가 지켜준 아이>가 발간되었다. 고양시가 후원하고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이 펴낸 이 책에는 금정굴사건 희생자 유족 4명의 참담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가 생생하게 실려 있다. 김민애 출판기획자와 김은주 다큐사진작가, 이현옥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사무국장이 작업에 참여했으며, 특히 페이지마다 삽입된 박건웅 작가의 삽화가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박 작가는 노근리 민간인학살, 인혁당사건, 광주민주항쟁 등 우리 역사의 비극적 순간들을 소재로 한 그래픽 노블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한 ‘작가주의 만화가’로, 그는 구술자들의 이야기 속에 담긴 공포와 슬픔을 서정적인 그림 속에 담아냈다.

<항아리가 지켜준 아이>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이어진다. 최근 우리나라 독립애니메이션 1세대 감독으로 손꼽히는 전승일 감독은 금정굴사건을 모티브로 한 단편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금정굴 이야기>의 제작을 준비 중이다. <항아리가 지켜준 아이>를 원작으로 금정굴사건 희생자 유족들의 실제 이야기를 15분 내외 러닝 타임에 담아낼 예정이다. “금정굴사건이라는 아픈 역사를 다양한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해 시각적 언어로 재구성해보고 싶었다”는 전 감독은 “이번 작업을 통해 평화와 인권의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었으면 좋겠다”며 기대를 드러냈다. 특히 <금정굴 이야기>는 제작비 전액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금한다. 내년 3월까지 제작을 마친 뒤 상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금정굴사건 현장 곁에 쌓인 돌무지

이재준 고양시장은 지난 21일 금정굴유족회와 간담회를 갖고 유족들의 최대 숙원인 ‘금정굴평화공원’ 건립에 있어 이념적 갈등으로 다시금 상처받지 않고 진행될 수 있는 방안 마련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날 이 시장은 “평화공원은 절대 납골당이 아니라 국가가 사과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라며 현장보존 및 추모비 설립 등 평화공원 조성 의지를 분명히 했다. 어쩌면 고양지역의 진정한 평화는 금정굴이 화해와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훼손되고 망각된 비인간적인 잔인한 기억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장소로 다시금 금정굴을 만나야 한다.​ 황룡산 나지막한 자락에 위치한 금정굴을 찾으며 고양 시민사회의 평화에 대한 노력을 되새긴다.

참고문헌

_신기철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도서출판 자리, 2011)

_금정굴인권평화재단 <항아리가 지켜준 아이>(황금동굴, 2020)

_namu.wiki <고양 금정굴 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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