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그림 : 정운자/시인ㆍ수채화가
학인이 동암에 오른 지 보름이 되었습니다. 노사가 하루는 학인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노사: 시(詩)를 지어 보거라.
학인: 하늘로 이불삼고 땅으로 구들삼고 산으로 병풍치고 달빛으로 등불 켜고….
노사가 “삼계가 다 환영이며 삼계는 실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 공화(空華)거늘 이불삼고 구들삼고 병풍치고 등불 켜고……. 그리고 뭐? 언제 머리가 툭 터질꼬……” 하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노사: 이놈아, 눈은 옆으로 찢어졌고 코는 밑으로 곤두섰으니 밥만 들어가면 입이 저절로 벌어지지? 단순히 간견산취시산 간견수취시수(看見山就是山 看見水就是水, 산을 보면 곧 산이었고 물을 보면 곧 물이었다)? 그건 시가 아닌 거여. 색(色)이 있으면 공(空)이 있어야지.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 불재하처(佛在何處),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면 부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학인: …….
노사: 그래 서녘 저 노을 뒤에는 무엇이 있는고?
학인: …….
노사: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이놈아. 단단히 보아라. 지구 한 바퀴 돌면 바로 네가 있는 기라.
학인은 모습은 “색(色), 헛것이다, 운수야. 모습에 머물러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문에 들어오는 자 세상의 알음알이를 버려라!”라는 노사의 그 말씀에 할 그리고 방을 맞은 듯 사유의 문이 꽉 막혀버렸습니다.
노사: 생사가 급하긴 한 모양인데 당처(當處)가 없구나. 산시산 수시수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대기(大機, 마음의 지혜 작용을 표현하는 말)라야 대용(大用)인 것이다. 당체(當體)가 없으면 진공과 묘유(妙有)는 모르는 법. 선(禪)을 하는 너는 누구냐? 견산불시산 견수불시수(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해야 시가 되는 거야.
학인: …….
노사: 오늘부터 네놈은 돌을 주워와 이 네모 칸을 채우도록 해라. 돌의 크기는 너무 작아도 안 되고 너무 커도 되지 않는다. 물을 흐르게 하고 꽃을 피우게 하려면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게 해야 한다.
학인: …….
노사가 학인의 위아래를 쓸어보더니 절 마당 가운데 주장자로 네모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노사가 그린 네모는 너무 작았습니다. 학인이 누우면 딱인 그런 네모였습니다. 노사는 잠시 생각을 한 지팡이를 학인에게 건넸습니다.
노사: 내가 그린 선을 건드리지 말고 선을 크게 만들어봐라.
학인은 그어진 선을 바라보며 온갖 방법을 다 궁리해 보았습니다. 깊이 생각해보아도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선에 손을 대지 않고서 어떻게 선을 크게 만들 수 있나?’ 순간, 학인은 노사가 그린 네모난 선 위에 더 커다란 네모난 선을 만들었습니다. 과연 그랬더니 노사가 그은 선이 상대적으로 작아졌습니다.
노사: 대자유의 길 이제부터가 너는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더 커진 네모만큼 돌을 주워와 채워라. 그리고 지게를 만들어 진흙을 찾아가지고 오도록.
학인: …….
학인은 ‘당체즉공(當體卽空)인 것’을 하며 스스로 빡빡머리를 딱 때렸습니다. 법신(法身)이 곧 허공(虛空)이요 허공이 곧 법신이다. 산은 산일 때. 그러나 노사가 요구한 타파허공골(他破虛空骨)하면 산은 산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학인: 아직 모르겠습니다. 타파일편(打破一片)할 수 있도록 하나만 더 일러 주십시오.
노사: 천지지천천지전(天地地天天地轉) 수산산수수산공(水山山水水山空).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다. 하늘과 땅이 마주 안고 구르면 물이 산이요 산이 물이다. 물과 산이 송두리째 공하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학인은 노사의 말을 듣고 ‘천지지천천지전, 수산산수수산공’을 팔만 번도 더 외우며 나무삭정이를,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 잘라 해다 뒷곁에 쌓았고 노사의 방에 불을 때주었으며 산의 계곡을 헤매며 얇고 넓적한 돌을 주워왔습니다.
학인은 노사의 뜻을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바위절벽 아래의 암자. 동암은 바위가 많고 능선이 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구름과 겹겹의 산, 그 벼랑 끝, 그 굽이 아래 방 하나 부엌 하나인 암자에 방 하나를 더 들이는 불사였습니다. 끝도 없는 돌길, 학인을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습니다.
노사: 이 돌은 안 된다. 법명이 ‘일각(一覺)’이라 했나?
학인: 네, 스님.
노사: 일각아. 이 돌은 불을 먹으면 갈라진다. 이 돌도.
학인: 네, 스님. 채우겠습니다.
노사: 천천지지하증전(天天地地何曾轉) 수수산산각완연(水水山山各完然)이로구나.
노사가 돌아섰습니다.
노사: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다. 언제 일찍이 마주 굴렀던가.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 제각기 완연하구나. 무엇을 얻기 위해 어디로 가려는가. 행(行)이 없는 언어와 문자, 말로는 다 소용없다고 했다. 하늘에 닿은 바닷물을 어떻게 쏟을 것이냐?
가르침을 받은 학인은 주장자를 짚고 허적허적 산으로 드는 노사의 뒤쪽에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땅바닥에 철썩 엎디어 삼배를 올렸습니다. ‘그동안 고정되게 붙들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학인은 노사로 인해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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