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 방학의 추억

_갈론마을과 산막이옛길

유성문 주간 승인 2021.07.15 10:58 의견 0

고대하던 방학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외갓집으로 향했다. 몇 번이고 버스를 갈아타고 시골마을에 내리면 키 높은 미루나무가 햇빛에 반짝거리는 한적한 시골길, 그 길 깊숙이 외갓집이 있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버선발로 뛰어나온 할머니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고, 마루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는 사이 할아버지는 두레박에 앉혀 우물 속에 담가두었던 수박을 꺼내오셨다. 그뿐이 아니었다. 옥수수며 감자며 ‘자연마켓’에서 건져온 먹거리들로 입질은 쉴 틈이 없었다. 저녁이면 마당 한가운데 멍석이 깔리고, 모깃불 곁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 무릎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은 그토록 총총했다. 다시 외갓집에 가고 싶다. 여름방학, 그 아름다운 추억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갈론마을 가는 길 ⓒ유성문(2006)

호수 끝에 섬처럼 떠있는 마을

청주 인근 산성리와 속리산 서쪽 사면에서 발원한 달래강(달천)은 보은과 괴산을 지나 충주 가금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한 오누이의 애틋한 전설을 안고 있는 이 작은 강은 그 이름만큼이나 시골스럽다. 구불구불 흘러내리며 지천으로 올갱이를 키우고, 가끔 뭍으로 올라서는 고추나 마늘밭의 고랑이나 적시기 십상이다. 남한강에 이르기 전에 이 강은 두 번 물막이에 가두어지는데 괴산호에서 한 번, 충주호에서 또 한 번이다. 그 괴산쪽 물막이 괴산호 자락에 갈론마을이 있다.

괴산호는 1957년 괴산수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생겨났다. 괴산수력발전소는 한때 우리나라 최초의 수력발전소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노후한 모습으로 잊혀져가고 있다. 수문이 열리지 않을 때면 사람들은 배수갑문 아래까지 들어가, 충청도에서는 ‘올갱이’라 부르는 다슬기를 잡는다. 그 댐 옆으로 호수를 끼고 겨우 차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길이 나있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비포장의 시골길이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깨끗하게 포장이 되어 있다.

갈은구곡 ⓒ유성문(2006)

키 큰 미루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5km즘 깊숙이 들어가면 호수의 끝에 마치 섬처럼 떠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갈론마을. 원래 이름은 ‘갈은(葛隱)’인데 ‘칡뿌리를 캐먹으며 은둔한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이곳은 은둔의 땅이었다. 조선시대의 은둔선비들, 박해를 피해온 천주교도들, 숱한 시인묵객들이 이곳에서 은둔의 세월을 지내고 갔다. ‘갈은구곡(葛隱九曲)’이라 불리는 계곡에는 구비마다 ‘갈은동문, 갈천정, 강선대, 옥류벽’ 같은 저마다의 이름이 붙여져 그들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십 수 년 전 내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마을이 시작되는 물가엔 작은 나룻배가 묶여있고, 길을 따라 들어가면 이내 사람이 살고 있는 초가집 한 채가 나타났다. 초가집 마당엔 경운기와 함께 소 한 마리가 한가로이 쉬고 있었다. 농사지을 땅이래야 대부분 비탈진 밭뙈기들, 그나마 버려진 밭고랑에는 무성한 잡초와 이름 모를 들꽃들이 한여름을 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영락없이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면 찾곤 했던 외갓집의 풍경 그대로였다.

갈론마을 농가 ⓒ유성문(2006)

지금의 갈론마을은 그때와는 많이 변했다. 마을 여기저기 펜션이 들어서고, 다리가 놓여 새로 개발된 ‘산막이옛길’이나 ‘충청도양반길’로 이어지면서 지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되었다. 그렇다고 추억마저 바뀔 리 없다. 여직도 대부분 담배와 콩, 고추, 참깨 농사로 살아가는 마을 방 한 칸을 얻어 든다면 방학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이야기와 재미로 꾸며진 길

사람들은 이제 고리타분한 옛 추억보다는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에 더 눈길을 준다. ‘올레길’이니 ‘둘레길’이니 새로운 이름을 달고 새로 분장한 것들이 트렌드요 대세가 된다. 하긴 ‘방학’보다는 ‘버케이션’이 더 그럴싸한 세상이니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어찌 탓하랴. 게다가 그 ‘새로운 것’들은 나름대로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산막이옛길’만 해도 그렇다.

산막이선착장 ⓒ유성문(2017)

갈론마을에서 물 건너 군자산 자락의 산막이마을에 이르는 길을 ‘산막이옛길’이라 부른다. 조선 후기부터 ‘연하구곡(煙霞九曲)’으로 불리며 명승지로 이름 높았던 계곡길이 괴산댐 건설로 일대가 수몰되면서 계곡 주변의 산 중턱으로 새로운 오솔길을 내고 그 길을 ‘산막이옛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길이는 약 3.9km이며 괴산호 서편으로 이어져 있다.

산막이마을에는 조선 중기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의 고택이 남아 있는데, 그의 후손인 노성도(盧性度, 1819~1893)가 연하구곡 일대의 풍광과 어우러지는 ‘수월정(水月亭)’이라는 정자를 건립하면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수월정은 괴산댐 건설로 수몰될 처지에 놓이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이건한 것이다.

수월정 ⓒ유성문(2017)

산막이옛길은 2011년 11월에 일반에게 개방되었으며,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 괴산군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 이 길은 괴산수력발전소에서 시작하며 차돌바위선착장을 지나 참나무 연리지, 소나무 출렁다리, 정사목, 호랑이굴, 매바위, 앉은뱅이 약수터, 얼음바람골, 호수전망대, 괴산바위, 괴음정, 마흔고개, 다래숲 동굴, 진달래동산, 물레방아, 산딸기길을 지나 산막이선착장에서 이른다.

괴산호에 바짝 붙어 맑은 물빛을 내려다보며 걷는 길로, 차돌바위선착장부터 산막이마을을 지나 복원된 노수신 유배지까지는 느긋하게 걸으면 1시간30분쯤 걸린다. 산비탈길이라고는 하지만 잘 깔린 나무 덱으로 이어져 노약자들이 걷기에도 그리 어렵지 않다. 가는 내내 지명에 얽힌 이야기와 출렁다리, 고공전망대 등으로 꾸며져 있어 지루할 틈도 없다. 그래도 힘들다면 돌아오는 길은 산막이선착장에서 10분 남짓 걸리는 유람선을 택할 수도 있다.

연하협 구름다리 ⓒ유성문(2017)


산막이옛길 끝머리인 수월정에서 한적한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괴산호 물길 건너 또 하나의 걷는 길이 시작된다. 바로 ‘충청도양반길’이다. 옛날 양반들이 과거 보러 가던 그 길을 따라 계곡과 강변을 걷는다. 연하협 구름다리를 건너면 다시 갈론마을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갈은구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길은 이내 속리산국립공원지구로 이어진다. 이쯤 잠시 쉬었다 가리라. 추억 속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추억’이라도 추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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