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물고기】 8 - 하얀 지팡이

혜범 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1.08.11 22:45 | 최종 수정 2021.08.12 10:46 의견 0

“거사님, 거사님. 톱 좀 빌려주세요.”

거사들이 머무는 요사채는 거개 절집 하방에 있었습니다.

“중이 톱은 뭐하게? 음…. 자네였군. 월세방 있냐고 동암 노장한테 가서 맞짱떴다며?”

'뭐할라꼬 중 되었덩고?'하던 노 거사였습니다.

“지팡이 좀 만들게요.”

“그래, 너의 방주인 영감 수명을 연장해 주려고?”

"……."

작은 새소리가 들렸습니다. 일각은 씩 웃었습니다. 비승비속(非僧非俗), 반승반속(半僧半俗)으로 사는 노 거사님이 동암 노장의 사형이라는 이야기는 진작에 들어 알고 있었다 했습니다.

“눈이 찢어졌고, 코는 밑으로 곤두섰으니 노장이 밥만 주면 저절로 입이 헤 벌어지지?”

들을 귀가 있으면 들으라는 듯 노 거사는 한 마디 던졌습니다.

“예, 자다가 제가 가끔 노장의 다리를 긁어서 탈이죠.”

‘아쭈, 요것봐라’ 하는 눈으로 노 거사가 일각을 문 안에서 내다보았습니다.

“소문은 들었네. 몇 번째 올라가서 노장이 받아준 거야?”

“서른세 번째 올라가서요. 오는 사람 반기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을 줄 알았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주고받는 마음이 평지풍파를 일으킨다고?"

하늘엔 하얀 낯 달이 떠 있었습니다.

그림 : 정운자/시인ㆍ수채화가

“거사님은 잘 지내셨어요?”

“먼먼 조상들의 죄까지 나한테 따지는 거냐?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지. 건강할 때 몸 조심해.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잘 보고."

“…네, 한 파도 속에 만 파도인데요. 뭐.”

“내가 문제 하나 낼 터인데, 그거 맞추면 톱을 빌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고. 그래 색신(色身) 밖에 법신(法身)이 있는가, 법신 밖에 색신이 있느냐? 자네의 허공경계를 가늠해보고 싶으네.”

“색신 안에 법신 있고 법신 안에 색신이 있죠. 그런데 연수목이 어디쯤 있어요?”

“그 스승에 그 제자로군. 원숭이 새끼들, 입만 나불대는 앵무새 새끼들."

"…비와 천둥을 조심하십시오. 뒤에는 벼락이 뒤따를 겁니다."

"오역죄라고? 지랄하고 자빠졌다. 야, 시주 밥벌레. 식충아. 톱 빌려주면, 내 지팡이도 하나 만들어줄 건고?”

“불법문중(佛法門中)에 어디 문(門)이 따로 있나요. 섰는 곳이 바로 진여문(眞如門)이고, 가는 곳이 열반로(涅槃路)이지요. 감태나무 있는 곳 갈쳐주시면요.”

“중암 위에 가면 벼락 맞은 감태나무, 천수목 좋은 놈 하나 있더라.”

“…….”

"그나저나 이게 뭔고?"

노거사가 문외문답(門外門答)이라는 듯 톱을 내밀며 물었습니다. 쭈그러진 손등에는 송충이 같은 푸른 실핏줄, 못이 박힌 손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도(道)를 알지 못합니다."

'도고 지랄이고, 안 받고 뭐혀?' 지청구를 던지던 노 거사가 톱을 내주며 '한심한 노인네, 또 젊은 놈 하나 버려 놓았구먼. 싸가지 하고는' 하고 문을 탕 소리 나게 닫아버렸습니다.

문 닫는 소리가 너무 커 일각은 한참이나 닫힌 문을 바라보고 서 있어야 했습니다. 돌아서니 배롱나무 꽃은 붉고 그 잎은 푸르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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