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물고기】 9 -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인고?
혜범 원주 송정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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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16:25 | 최종 수정 2021.08.3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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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없는 집에서 대답하는 자는 누구인가?”
“네, 고기가 활발발(活潑潑)합니다.”
“그래, 네놈이 고기가 되어 보았느냐?”
그때 바람이 불어 풍경이 울었습니다.
“저의 견(見)을 견이 아니라 하시면 제가 초라하고 옹색해집니다, 스님.”
“지금의 그 마음은 무슨 마음인고?”
“…모르겠습니다.”
“행할 수 있겠느냐?”
“…….”
“왜 입을 방구석에 두고 가지고 나오지 않아 대답을 하지 못하느냐?”
“…….”
“아이고,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는 놈. 성성착(惺惺著, 정신이 또렷이 깨어 있음)하지 못한 놈아. 이 세상 전체가 그대로 진리의 나타남이거늘.”
그림 : 정운자/시인ㆍ수채화가
일각은 고개를 숙였습니다. ‘사는 자, 실존하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숨이 막히고 기가 막혔습니다. 선(禪)과 명상은 달랐습니다.
‘행할 수 있겠느냐?’ 했을 때 그때 바로 액션을 취했어야 하는데, 찰나, 그 때를 놓쳤습니다.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부처가 중생이고,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인 것을. 자연인과 수행자, 그저 도피하고 패배하여 연명하는 자와 공부인(工夫人)은 달랐습니다.
본지풍광(本地風光)이 일고 있었습니다. 뭐랄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계랄까. 얼어붙음이랄까. 일각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습니다.
그렇듯 동암(東庵)의 전통은 할(喝)이었습니다. 큰소리로 귀가 멀도록 호통을 치는 대갈일성(大喝一聲)만이 할이 아니었습니다.
백중, 해제(解制)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노사(老師)의 일갈을 뚫지 못함에 ‘이 세상 전체가 그대로 진리의 나타남’이라는 할 없는 할, 무할(無喝)의 할에 환희심으로 하르르 몸을 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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