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업의 일상통신】 슬픔 혹은 홀가분

_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드리던 날

원동업 <성수동쓰다> 편집장 승인 2021.10.16 15:40 의견 0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는 걸 의논하게 된 계기는 한 만남 때문이었다. 그날 나는 일요일 아침의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였다. 우리가 늘 가는 산책로에는 운동기구들이 놓인 작은 공원이 있었고, 거기엔 여러 어르신들이 이미 운동 중이었다. 거기 한 아주머니가 우리 모자에게 다가왔다. “어머니 상태가 자녀들이 돌보기에는 이미 심각해지셨다!”는 게 그분 말씀의 요지셨다. 그 어르신은 어머니를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아온 분이었고, 우연히도 현재 어머니가 다니는 데이케어센터 관계자였기 때문에 이분의 말씀은 일종의 시그널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현재의 사태를 판단하고자 모였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셔야 할 이유는 여럿이었다. 어머니는 신체적 능력은 있었지만, 이미 일상적 활동은 곳곳에서 깨져왔었다. 어머니는 밥이나 국을 태웠고-해서 타이머 가스밸브로 교체했다–옷을 갈아입지 않았으며, 목욕도 스스로 하는 법을 잊었다. 철수세미로 프라이팬을 닦았고, 평생 동안 녹색 손가락을 가졌던-그래서 식물들과 물고기들을 잘 길렀던-어머니 집엔 어느새 조화만 남았다.

쉰밥을 물에 말아 먹고는 하는 게 어머니였지만, 이제는 그 ‘아낌’과 ‘절약’의 대상이 전방위로 퍼졌다. 어머니는 데이케어센터에서 문구용 가위들을 주머니 가득 챙겨오고 휴지를 둘둘 말아왔다. 바깥서 종량제봉투가 보이면 끈을 풀러 내용물을 옆의 재활용봉투 안에 집어넣고는 봉투를 가져왔다. 동사무소서 청소공무원이 찾아왔다. “재활용봉투에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을 200만 원쯤 내실 수 있습니다.” 집안이 쓰레기로 가득 차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매일매일 걷어서 아들들은 그걸 돌려주거나, 집으로 가져갔다.

어머니는 남의 집 감도 따오고-땡감이었다-동네 스티로폼 텃밭서 상추와 고추도 걷어왔다. 사정을 알면서도, 주인들은 얼굴을 붉혔다. 공원에선 살구를 한 봉다리 주워와 살구청-흙도 제대로 털리지 않은 채-을 담갔다. 살구나무는 때로 비탈에도 떨어졌는데, 그걸 줍느라 울타리도 넘곤 했다. 삐끗하면 굴러떨어질 참이었다. 한밤중에 새벽에 두세 번쯤 어머니는 대문을 열고 나갔다. 밖은 곧바로 이면도로였다. 늘 마을버스와 차량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곳이었다. 문을 잠가야 할까?

나는 일주일에 겨우 한번 어머니 집에 가서 데이케어센터에 보내드리는 일을 했다. 아침에 보내드려야 하므로 전날 가서 잠을 잤다. 한 달 한 번은 토요일도 맡았다. 그러니 어느 경우엔 48시간쯤을 모친과 지냈다. 밥하고, 청소와 설거지하고, 실내에 둔 용변통을 비우고, 피 묻은 빨래를 해 말리고, 이불을 털었다. 그렇게 어느새 3년여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4형제였는데, 내가 맡은 부담이 제일 작았다. 더 자주, 더 오랜 시간 어머니를 돌보는 아들들도 있었다. 응급상황이 생기면 전화가 그에게 갔다. 달려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그들이 갔다. 그들도 스스로도 자주 치과에, 정신과에, 병원에도 갔다. 그들도 힘든 일상을 겪는 중년의 소시민들이었고, 그 하중의 일부는 어머니 케어에서 원인이 오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아프셔서 요양병원 등에 모시기 전에,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시자는 결론을 냈다. 복지체계가 갖춰진 세상에서, 함께 부담을 나눠 갖자고 합의했다. 구체적으로 10월 중순에, 텃밭과 정원이 있는 요양원에….

물론 저항도 있었다. ‘아이를 키우기 어렵다고 한들 시설에 보내지는 않을 것이면서, 어머니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 보낼 수 없어!” 하고 선언한 아들도 있었다. 어머니도 반대였다. “아들이 몇인데, 내가 왜 요양원을 가?”

한발 한발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여기저기 요양원을 알아보고, 알아본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고, 비교하고, 분석하는 일을 거듭했다. 동시에 어머니를 센터에 보내드리고, 밥과 청소와 설거지와 빨래도 했다. 쓰레기를 되가져오고,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말리고, 때로 가로막고, 은근슬쩍 뒤로 제자리에 놓는 일도 계속됐다. 그리고 정말 겨울이 오기 전, 절차를 협의·합의한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정원과 주차장이 크고 잘 관리되고, 국가에서 감독을 하고, 오래 근무한 복지사가 일목요연하게 상담을 해준 곳이었다.

말을 다정하게 건네주고, 친절하게 보이는 언니들이 손을 끌어주고, 안에서는 친구 노인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어머니는 “저기에 들어가 보자!”고 말했다. 우리는 기꺼이 “그러시라!”고 잡은 손을 건네주었다. 어머니가 버티면 무슨 장면이 펼쳐질 것인가? 그 고민을 어머니가 스스로 지워준 것이었다. ‘어머니는 결국 이런 존재인 거지!’ 나는 생각했다.

돌아오면서 여러 겹의 생각이 서로 엉켰다. 기쁨은 아니었지만 홀가분한 건 맞는 것 같았다. 슬픔이 있었지만, “눈물을 흘리지만 졸업을 안 할 수는 없는 일이지!” 했던 박완서의 소설 한 구절도 생각났다. 더 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사실은 없었다. 그럴 수도 없었다. ‘어머니를 보낸다’ 하는 순간부터 시간이 붕 떠서,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어머니 손을 잡아 귀를 기울이며 말 걸어주는 요양보호사 혹은 사회복지사의 뒷모습에 대해 고마웠다. 세금은 아까울 게 없었다. 이런 데 쓰인다면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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