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these contradictions, however, are the warp and woof of books on Japan. They are true. Both the sword and the chrysanthemum are a part of the picture. The Japanese are, to the highest degree, both aggressive and unaggressive, both military and aesthetic, both insolent and polite, rigid and adaptable, submissive and resentful, loyal and treacherous, brave and timid, conservative and hospitable to new ways. --Ruth Benedict,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P 2
이 모든 모순이 일본에 대한 책의 씨줄과 날줄을 이룬다. 이 모든 모순은 진실이다. 칼과 국화가 일본이라는 그림의 일면이다. 일본인은 극도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공격적이면서도 비공격적이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심미적이고, 무례하면서도 공손하고, 경직되어 있으면서도 적응성이 있고, 순종적이면서도 부당한 대우에 분개하며, 충성스러우면서도 반역기질이 있고, 용감하면서도 소심하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방법에 호의적이다.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중에서
*<국화와 칼>을 지은 미국의 인류학자 Ruth Benedict(루스 베네딕트, 1887~1948) 여사는 전쟁 당사국인 일본에 직접 갈 수가 없었기에 미국에 거주 중이던 일본인 이민자와의 인터뷰, 그리고 영화, 도서 등을 통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연구했다고 한다. 일본인 특유의 내면에 숨겨진 ‘혼네(本音:ほんね, 속마음)’와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는 ‘다테마에(立て前, 겉치레)’를 칼과 국화로 묘사했으며, 1946년에 출간되었다. <Patterns of Culture(문화의 유형,1934)도 유명한 저서이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삼국시대부터 일본에 중국의 문화와 불교를 전파해 주었고, 오랫동안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선진국이었다. 이러한 한국이 일본에게 두 번이나 침탈을 받았다. 하나는 정명가도(征明假道;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명나라를 정복한다며 조선을 지나가도록 해달라는 내용)를 요구하여 일어난 임진왜란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통치이다. 임진왜란은 의병 등 국민의 힘으로 물리쳤으나, 일제 식민지로서는 36년간 통치를 받아야 했다. 이에 따른 반일감정으로 우리는 이제껏 일본의 많은 기술에 의존하면서도 일본을 항상 멸시한다. 그러나 일본은 스위스, 독일과 더불어 세계에서 기술의 원천인 특허를 가장 많이 가진 과학 강대국인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 <The Making of Modern Japan(현대 일본의 형성, 2000)>
미국의 일본사학자로 프린스턴대학교 교수였던 Marius B. Jansen(마리우스 B. 잰슨, 1922~2000)은 일본 근대사와 현대사에 관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With Japan united and no further provinces to conquer, Hideyoshi turned to thoughts of empire in Korea and China. Historians argue that one purpose of the campaign was to occupy the daimyo armies, since there was no further territory in Japan with which to reward them; others suggest that Hideyoshi desired to renew licensed trade with Ming China. --P 19
일본을 통일하고 더 이상 정복할 지방이 없게 되자 히데요시는 제국의 구상을 조선과 중국으로 돌렸다. 역사가들은 군사행동의 한 가지 목적은 일본에서 다이묘(大名)에게 보상으로 나눠 줄 땅이 없게 되자 다이묘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히데요시가 명조(明朝)와 공인된 조공무역-학술용어로 감합(勘合)무역-을 재개하기를 바랐다고 주장한다.
The third of the unifiers was Tokugawa Ieyasu, who was able to seize the gains scored by this two predecessors. He lived long enough to complete his work, he had enough sons to relieve him of dependency on the loyalty of his vassals, and he established a shogunate that endured until 1868. --P 29
세 번째 통일자는 두 선배가 이루어 놓은 성과를 장악할 수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그는 자신의 과업을 완성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았고, 가신들의 충성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시켜줄 여럿 아들을 두었으며, 1868년까지 지속된 막부(幕府)를 수립했다.
Between 1868 and 1902, 11,148 passports were issued for overseas. Within five years of the Restoration private efforts to promote study abroad were beginning to compete with public, and students headed overseas in large numbers. In the first decade of Meiji one-third of these (293), headed for the United States, one-tenth (178) for England, and another 69 for German. --P 361
1868년에서 1902년 사이에 1만1,248건의 유학생 비자가 발급되었다. 메이지 유신의 5년 동안에 해외유학을 촉진하는 개인적 노력이 국비유학생과 경쟁하기 시작했고, 많은 수의 학생이 유학을 떠났다. 메이지 시대 10년 동안 유학생 가운데 3분의 1(293명)이 미국으로, 10분의1(178명)이 영국으로, 그리고 69명이 독일로 향했다.
The most striking contrast with the prewar Japanese government was surely the absence of a military establishment that could claim the authority of the throne. The Self-Defense Forces, under the control of the prime minister’s office. --P 725
전쟁 전의 일본 정부와 가장 놀라운 대조는 확실히 천황의 권위를 주장하는 군부의 부재였다. 자위대는 수상실 통제 하에 있다.
Japan’s economic rebirth was aided by a mixture of external and internal factors. It has already been noted that the Korean War, disastrous as it was boosting the economy. --P 727
일본의 경제부흥은 국내외 요인의 복합이 도와주웠다. 한국전쟁은 재난이었지만 일본 경제를 부양시킨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The Meiji revolution disarmed those samurai and armed the state instead. The new Meiji empire flourished briefly, but in defeat that state was itself disarmed. Reconstruction brought enormous economic influence and power, but that structure too was not immune to cyclical decline. --P 765
메이지 혁명이 이런 사무라이를 무장해제하고 대신에 국가를 무장시켰다. 새로운 메이지 제국은 잠시 번성했지만, 패전으로 국가 자체가 무장해제되었다. 재건은 엄청난 경제적 영향력과 국력을 가져왔지만, 그 구조는 주기적 불황에 면역력이 없었다.
◆ <A Modern History of Japan(일본 현대사, 2009)>
앤드루 고든(Andrew Gordon, 1952~ )은 미국 보스턴 출신으로, 현재 하버드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다. 도쿠가와 시대부터 2006년까지 일본의 약 200년간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정리한 일본 근현대사 입문서이다.
Diplomatic relations with Korea were carried out beginning in the early 1600s. The Koreans sent twelve major embassies to Japan between 1610 and 1811, roughly one visit each fifteen years. Each embassy brought from three hundred to five hundred members. They would come on occasions of congratulation, such as the birth of a shougunal heir or the accession of a new shogun. There were no mission in the reverse direction. While the Japanese actively sought to have Koreans come, the Koreans never invited the Japanese, and they rebuffed occasional Japanese inquires. --P 20
17세기 초의 국교회복 이래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으로부터 통신사 등 대규모 공식사절단이 12차례 일본에 파견되어 왔다. 10~15년에 한 번꼴이 된다. 한 차례의 통신사 규모는 300~500명에 달하고, 그 시기는 새로운 쇼군의 취임이나 쇼군 후계자의 탄생을 축하할 때였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 조선으로 보낸 공식사절단의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 측에 사절의 파견을 적극적으로 촉구한 데 비해 조선이 일본 측에 사절의 파견을 요청한 적은 없었고, 일본 측이 가끔 사절 파견을 타진해도 조선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This sort of elite–led revolution took place in Japan because of particular features of the samurai class, both weaknesses and strengths. On the negative side, change was possible because the samurai were not a securely landed elite. They were essentially salaried employees of their lords. Although this satus was hereditary, it was less rooted in property than a European-style feudal estate, a Chinese gentry holdings, or a Korean aristocratic status(yangban). --P 62
일본에서 엘리트 주도의 혁명이 발생했던 것은 사무라이 계급의 특성-약점과 강점–때문이었다. 부정적 측면에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무라이가 토지를 확보한 엘리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다이묘로부터 봉급을 받는 피고용자였다. 이들의 신분은 세습되었지만, 유럽식 봉토나 중국의 신사와 조선의 사대부(양반)가 보유하던 토지와 같은 일종의 사적인 재산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었다.
With grand language, in 1872 it declared four years of elementary education to be compulsory for all children, boys and girls: “In a village there shall be no house without learning, and in house, no individual without learning.” This important step reflected the new leader’s understanding of the sources of Western power. --P 67
1872년에 (일본)정부는 “마을에 불학(不學)의 가구가 없고 가정에 불학의 사람이 없기를 기대한다”라는 고매한 이상을 내걸고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어린이에게 4년간의 초등교육을 의무화한다는 학제를 공포했다. 이 중요한 조치에는 서구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지도자들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After all, it was a faction of the samurai “aristocracy” more than an emerging class of bourgeois capitalists that imposed the Meiji changes. --P 75
결국 메이지 시기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신흥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이 아니라 사무라이 ‘귀족계급’의 일부였던 것이다.
Military and economic domination were two sides of a single coin. All of Japan’s elites as well as the vigorously opinionated public saw Korea, and Asia more generally as a frontier for Japan’s expanding power and prestige. The move to empire was thus “overdetermined.” --P 122
군사력과 경제적 지배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일본의 모든 엘리트와 일본이 뛰어나다는 관념에 강하게 빠진 일본의 민중은 한국을, 나아가 일반적으로 아시아를 일본인으로 하여금 힘과 명성을 확대해 나가기 위한 개척지로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으로의 매진은 ‘과잉결정’되었다.
On August 15, 1945, the emperor announced the nation's surrender to the Allied powers with his first radio broadcast ever. Some of his stunned listeners would later call that August noon as an instant of “rebirth,” For these people, the surrender was a moment when past experience and values were rendered illegitimate. --P 224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지만, 직접 라디오 전파를 통해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한다고 발표했다. 이 천황의 목소리 방송을 듣고 깜짝 놀란 일부 일본 국민은 훗날 그 8월 15일을 ‘재생’의 순간으로 회상하게 된다. 일본인들에게 항복은 과거의 경험과 가치가 불법화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The Japanese economy expanded at a stunning pace from 1960 through the early 1970s. These two decades, beginning with the Korean boom, have come to be called the “era of high speed growth” by historian. --P 243
일본 경제는 1950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줄곧 경이적인 속도로 확대를 계속해 왔다. 한국특수 붐으로 시작된 20년간을 역사학자들은 ‘고도성장기’라 부른다.
◆ <Japan and the Shackles of the Past(일본과 과거의 굴레, 2014)>
R. Taggart Murphy(태가르 머피, 1952~ )는 쓰쿠바대학교 도쿄캠퍼스에서 국제 비즈니스 MBA 프로그램의 정치경제학 교수로 재임했고, 퇴직 후에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But in the rest of the world, ruling elites have become more Japanese in at least this one crucial respect: learning to live with the constant presence of contradiction while perfecting the mental gymnastics necessary to deceive oneself about motive while still acting on that motive. --P xxvii
하지만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엘리트 지배층은 최소한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점차 일본처럼 변해 왔다. 그것은 스스로 상존하는 모순과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동기를 스스로 숨기기 위한 심리적 곡예를 연마하면서, 그 숨은 동기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What drew them all was sex. Sex served as the not-so-hidden root, the energy source behind the brilliant efflorescence of popular culture during the Edo period. Later, when the Japan began taking their cues from priggish Westerners, the origins of such quintessentially Japanese art forms as Kabuki and ukiyo-e were deliberately obscured -particularly when Westerners began going gaga over Japanese prints and other artifacts of Edo popular culture, which had therefore been as little better than trash by Japan's elite. --P 45
이들 모두를 끌어들인 것은 섹스였다. 섹스는 에도 시대에 화려하게 꽃핀 대중문화를 움직이는 공공연한 뿌리이자 원동력이었다. 나중에 일본인들이 서양인들의 도덕관념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가부키나 우키요에 같은 정통 일본예술의 뿌리는 의도적으로 숨겨졌다. 특히 그때까지 일본의 지도층에게 쓰레기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던 에도 대중문화인 목판화나 예술품들에 서양인들이 열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랬다.
The samurai ethos itself had ossified to the point of caricature during the Edo period as samurai retreated into ever more histrionic displays of self-sacrifice and hyper-stoicism as compensation for living in a society where such virtues had become in fact meaningless. But with Japan suddenly facing both external military and domestic civil threats, these virtues were dragged out of their Edo period museum and refashioned to suit not just a modern military but militarized society. --P 73
사무라이 정신 자체도 에도 시대에 이미 풍자의 대상이 될 정도로 화석화되었다. 사무라이들은 그런 정신이 실질적으로 무의미해진 사회에 대해 시위라도 하듯 좀 더 과장된 자기희생과 지독한 금욕주의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일본이 갑자기 외부로부터의 군사위협과 국내의 격화된 자유민권운동에 직면하자, 사무라이의 가치는 에도 시대 박물관으로부터 꺼내져서 단지 근대화된 군대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군국주의 사회 전체에 필요한 가치로 재포장되었다.
But such consciousness of “Japanese” had been largely limited to the upper classes. Even among most of their members, loyalty to han, daimyo, or shogun had often taken precedence over loyalty to “Japan.” That was certainly the case among the peasantry. A critical mission of Meiji was smashing those loyalties and replacing them with nationalism and emperor-worship. --P 74
하지만 이런 ‘일본’에 대한 의식은 상류층에만 존재했다. 상류층에서조차 ‘일본’보다는 대부분 번과 다이묘와 쇼군에 대한 충성이 우선했다. 농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메이지 정부의 중대한 임무는 그런 작은 의미의 충성을 깨트리고, 대신 민족주의와 천황에 대한 숭배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The Korea War broke out in 1950, and the Americans began placing waves of orders for all the goods other than weapons themselves that they needed to supply their soldiers. And they paid for the goods in dollars. The Japanese spoke of the order as “manna from heaven.” --P 113
한국전쟁은 1950년에 발발했고, 미국은 미군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필요한 무기 이외에 모든 물자를 끝없이 발주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대금을 달러로 지급했다. 일본인들은 그런 주문을 “하늘의 내린 맛있는 음식”이라 불렀다.
The consolidation of the “1955 system”- the rubric applied to Japan’s postwar political setup reflecting the founding year of the LDP – effectively blocked leftist access to power through the electoral system. --P 118
자민당이 1955년 각 세력을 규합해 창당하면서 ‘1955년 체제’라는 전후의 정치구도가 형성되었는데, 이 체제는 좌파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길을 실질적으로 봉쇄했다.
Once the war to bring the Eight Corners of the world under One Roof had been irrevocably lost and the Americans had demonstrated they were not going to go away, Japan turned on a dime and figured out not only how to live in the shadow of an overweening, hectoring American presence while preserving its “Japaneseness”, but thrived, becoming an indispensable pillar of the American world order. --P 386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실현하려던 전쟁에서 돌이킬 수 없이 패하고, 미국이 일본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일본은 태도를 급선회했다. 오만하고 위협적인 미국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다움’을 보존하면서 번영을 이루어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필수불가결한 한 축이 되었다.
◆ <China and Japan(중국과 일본, 2019)>
미국 하버드대학교 석좌교수이자, 동아시아 전문가인 Ezra F. Vogel(에즈라 보걸, 1930~ )은 중국과 일본의 1,500년간 교류의 역사에서 주요한 전환점들을 살펴보고, 그것이 중일관계에 미친 영향을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입체적으로 검토한다. 저자는 <덩샤오핑 평전>과 <저팬 애즈 넘버 원>으로 각각 중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Japan’s extraordinary successes, beginning in the 1860s with the building of a modern administrative structure, a modern educational system, and a modern economy, ultimately did not lead to glory but to tragedy, for both Japan and its neighbors. Millions of Japanese died, not only in China but also in Japan. Japanese cities were destroyed and its industries lay in ruin. The occupation of Manchuria had brought earlier economic benefits to Japan, but 1937-1945 Sino-Japanese War was for Japan an unmitigated disaster. --P 283
1860년대 근대적 행정구조, 근대적 교육제도, 근대적 경제를 구축하면서 시작되었던 일본의 이례적인 성공은 결국 일본과 주변국들 모두에게 영광이 아니라 비극으로 이어졌다. 중국에서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수백만 명의 일본인들이 죽었으며, 일본의 도시들이 파괴되고 산업이 폐허가 되었다. 일본의 만주 점령은 초기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으나, 1937~1945년 동안의 중일전쟁은 일본인에게 완전한 재앙이었다.
Sino-Japanese War from 1937 to 1945 inflicted enormous tragedies on the Japanese but even more tragedies on the Chinese, tragedies that have continued to shape Chinese attitudes toward Japan. --P 285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중일전쟁은 일본에 엄청난 비극을 일으켰지만 중국에는 더 큰 비극이었고, 이 비극은 계속해서 일본에 대한 중국인들의 태도를 형성했다.
It is unrealistic to expect that China and Japan in the next decade will enjoy “hot politics.” But if they can continue to expand their cooperation in such enterprises as the Belt and Road Institute, in developing joint projects for solving environmental issues, and in multinational organizations, it is not impossible that they could achieve “warm politics.” --P 415
다음 10년 동안 중국과 일본이 ‘뜨거운 정치’를 즐길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양국이 일대일로 같은 사업들,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 프로젝트 개발, 다국적 조직에서의 협력을 계속 확장할 수 있다면 ‘따뜻한 정치’를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 것이 아니다.
◆ <The Rising Sun(떠오르는 태양, 2003)>
미국 출신의 작가인 John Toland(존 톨런드, 1912~2004)는 이 책으로 1972년 논픽션 부분 퓰리처상을 받았다. 저자는 이 책의 자료 수집을 위해 일본인 아내와 함께 동남아시아 등 격전지를 돌며 500여명의 사람들과 인터뷰했다고 한다.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망에 대한 기록이다.
I have done my utmost to let the events speak for themselves, and if any conclusion was reached, it was that there are no simple lessons in history, that it is human nature that repeats itself, not history. We often learn more about the past from the present, in fact than the reverse. --P xv
나는 사건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어떤 결론에 도달한 것은 역사에는 단순한 교훈은 없으며,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과거로부터 현재를 배우는 것보다 현재로부터 과거를 더 많이 배우게 된다.
While the supremacy of civilian leaders over the military was a fundamental aspect of American democracy, the reverse was true in Japan. The Meiji Constitution had divided the power of decision between the Cabinet and the Supreme Command, but the military leaders, who had little understanding of political and diplomatic affairs, could almost always override the civilians in the Cabinet; their resignation would bring down the government. --P 62
군부에 대한 민간 지도자들의 우위가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모습이라면, 일본은 그 반대였다. 메이지 헌법은 내각과 최고사령부 사이에 결정권을 분할했지만, 정치나 외교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군부 지도자들은 거의 언제나 문관 각료들을 무시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사임을 무기로 삼아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America certainly would never have risked going to war solely for the sake of China. It was the fear that Japan in partnership with Hitler and Mussolini would conquer the world that drove America to risk all. And the ultimate tragedy was that Japan had joined up with Hitler mainly because she feared the Anglo-Saxon nations were isolating her; hers was a marriage in name only. --P 147
미국은 분명히 중국을 위해서 홀로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이 히틀러 및 무솔리니와 손잡고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미국으로 하여금 온갖 위험을 무릅쓰게 했다. 그리고 최후의 비극은 일본이 단지 앵글로색슨 국가가 일본을 고립시킬 것을 두려워하여 히틀러와 동맹을 맺은 것이다. 하지만 그 동맹은 명목상의 결혼에 지나지 않았다.
The central instrument of Japan’s political aims was still the Greatest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and if Japan was losing the battle of production, she was winning the battle of propaganda throughout a large part of the continent. It was a policy that envisaged an Asia united “in the spirit of universal brotherhood” under the leadership of Japan, with each nation allotted its “proper place” by the Emperor; it would lead to peace and prosperity. --P 447
일본의 정치적 목적의 중심은 여전히 대동아 공영권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생산 전쟁에선 지고 있더라도 아시아 대륙의 대부분 지역에서 선전(宣戰) 전쟁으로 승리하고 있었다. 아시아 각국을 천황의 ‘고유 영토’를 할당받은 상태에서 일본의 지도 아래 아시아를 ‘사해 동포주의’로 묶으려는 정책이었다. 이것이 평화와 번영이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World WarⅡwas over, but it had left in its wake more problems than it had solved. Asia, in the throes of an extensive revolt, was discarding the shackles of western domination. Warfare would be transformed from a global conflict into fragmented nationalist struggles of liberation. Ironically, one of Japan’s most cherished war aims was being achieved. Asia was at last freeing itself from the white man. --P 876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하지만 이 전쟁은 해결한 문제보다 더 많은 자취를 남겼다. 아시아는 광범위한 저항의 진통 속에서 서양의 지배라는 족쇄를 벗어던졌다. 전쟁은 세계적인 갈등에서 분열된 민족주의적 해방투쟁으로 전환되었다. 역설적으로 일본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전쟁목표 중 하나가 실현되고 있었다. 아시아는 마침내 백인들에게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 일본은 경계하면서도 가깝게 지내야 한다
일본은 아직도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나라처럼 보인다. 국민들이 정부에 순응하고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에도막부(江戸幕府,1603년~1868년) 시대 264년간 철저하게 길들여진 탓이다. 일본은 1868년 사무라이가 일으킨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천황을 복고하고 사무라이 정신을 승화시켜 군국주의를 확립하면서 아시아를 점령한 제국이 되었다. 명치유신 이후 수립된 기초과학에 근거한 과학과 기술은 지금도 최고 일류국가이다. 100년 이상 국민이 책을 읽는 문화국가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과 함께 일본이 포함된다.
우리나라는 위로부터 혁명인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이 실패로 끝났으나, 일본은 같은 위에서부터의 혁명인 명치유신의 성공으로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는 지금도 여전히 사무라이 체제와 비슷하게 자민당이 독점하고 있다. 어쨌거나 선진국인 일본에서 정치만 빼고 배워야 할 점이 많은 게 현실이다.
일본의 독도에 대한 소유권 주장에 맞서서는 한국도 이승만 정부 초창기에 주장한 것처럼 쓰시마(대마도)에 대한 영토 주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조선시대에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기록은 조선과 일본에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본에 대해 좀 더 철저히 분석하고 배워 슬기롭게 승일(勝日)하면서, 동시에 변화무쌍한 21세기에 동반자적 상호협력을 통해 서로 발전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결코 일본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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