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어느 택시기사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2.05.30 14:31 | 최종 수정 2022.06.13 15:26 의견 0

차 안에 파스 냄새가 진동했다. 모처럼 서울에 가서 형님, 아우와 술 한잔 하고 오는 길이었다. 술보다 사람의 향기에 취한 밤이었다. 버스는 기대하기 어려운 시간이라, 지하철에서 내려 1000년 만에 택시를 탔다.

앞 손님이 남기고 간 파스 냄샌가? 나이를 먹을수록, 타인의 통증이 곧잘 내 가슴의 통증으로 치환되고는 한다.

"출판단지 은석교 사거리 가주세요."

무뚝뚝해 보이는 기사에게 한껏 친절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목적지를 말했다. 기사는 내가 말한 목적지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대답 없이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핸드폰에 대고 외쳤다.

"은석교 사거리!"

핸드폰은 묵묵부답이었다.

"출판단지 은석교 사거리라고 해보세요. 그것도 안 되면 출판도시..."

"출판단지 은석교 사거리!!!"

자리 공부를 전혀 안 하고 나온 핸드폰인 것 같았다. 기사는 핸드폰의 지시가 없으면 한발짝도 뗄 수 없다는 듯 계속 출판단지와 은석교를 외쳤다.

"안 나오는데요?"

왜 핸드폰이 모르는 곳으로 가자고 해서 속썩이느냐는 듯, 기사가 잠시 나를 돌아봤다. 손가락으로 치면 될 텐데 왜 저리 외치기만 할까. 출판단지 모르는 내비게이션이 어디 있담... 먼 곳도 아닌데.


"손으로 한번 해보세요."

하지만 내 권고를 들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어찌어찌 출발하긴 했지만, 취한 눈에도 내가 가려는 방향은 아니었다. 사거리에서 긴 신호 대기를 하는 중에 기사에게 다시 말했다.

"지금 잘못 가고 있어요. 손으로 은석교 사거리 쳐보세요."

그제서야 기사가 더듬더듬 은석교 사거리를 쳤다. 주르르 목적지가 떴다. 기사는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주는 대로 유턴을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택시요금은 평상시보다 1000원 이상 더 나와 있었다. 카드를 내밀면서 잠깐 얼굴을 훔쳐봤지만, 끝내 나이는 훔쳐볼 수 없었다. 마스크 속 사람의 나이를 짐작하는 일은 여전히 낯설다. 나보다 크게 적은 나이는 아닌 것 같았다. 카드를 돌려 받는데 다시 파스 냄새가 훅 차 안을 내달렸다.

아! 다른 손님이 남긴 냄새가 아니라 기사가 붙인 파스 냄새였구나. 파스 냄새가 아니라 고단한 삶의 냄새였구나. 선천적으로 무뚝뚝한 사람이, 지리라고는 동네밖에 모를 것 같은 사람이 택시기사를 하려니 얼마나 힘들까. 말귀가 어두운 기계와 씨름하려니 얼마나 난감할까. 돌덩이라도 얹고 다니는 듯 기사의 등이 유난히 무거워보였다. 더 이상 남이 아니었다.

사실 요즘 나도 택시기사를 해볼까 심각하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일이라고 좋은 시절일까.... 5월의 꽃향기 대신 집요하게 따라오는 파스 냄새를 데리고 어두운 길을 걸었다. 남의 눈물을 빌어 나를 운다더니, 술기운이 있던 자리에 서글픔 한모금 고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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