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로 세상읽기】외국인이 바라본 한국의 역사와 사회-1

김위영 산업번역 크리덴셜 대표 승인 2022.06.26 19:48 의견 0

미국에서 한국 역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Edward W. Wagner(에드워드 와그너, 1924-2001) 교수는 하버드대학교에서 한국학을 연구했고, 한국학 강좌를 신설한 제1세대 재미 한국사학자였다. 그 이후 팔레, 커밍스, 던컨, 도이힐러 등 수많은 한국학 학자들이 저서를 발표했다. 이들 저서로 바탕으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정리해본다.

고려와 조선은 고대노예제 시대였다

_<Views on Korean Social History(한국 사회사에 대한 견해, 1998)>

미국의 저명한 한국사학자였던 James B. Palais(제임스 팔레, 1934-2003) 교수는 한국이 11세기부터 19세기(고려 및 조선 시대)까지 노비 비율이 대체로 30퍼센트를 넘은 노예제 국가였다고 주장하여 큰 파장이 일으켰다. 중국에서 송나라 때 노비가 사라진 반면에 조선에서 동족을 노예로 삼은 것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희귀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Orlando Patterson, in his Slavery and Social Death: A Comparative Study, published in 1982, including Korea among the world’s slave societies. This treatment has raised controversy in South Korea scholarly circles, but if you consider that most of the famous slave societies in world history had a slave population of about 30 percent, then it appears that Patterson’s inclusion of Korea is justified. --P34

올랜도 패터슨이 1982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노예와 사회적 죽음; 비교연구>에서 세계 노예사회에 한국을 포함시켰다. 이런 취급은 한국 학계에서 논쟁을 일으켰지만 세계 역사상 유명한 노예사회의 대부분이 약 30%의 노예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패터슨이 한국을 포함시킨 것은 정당하게 보인다.

30 percent is the figure for ancient Greece, Republican Rome, Imperial Rome, and the antebellum South in the United States prior to the civil war. --P34

30%는 고대 그리스, 로마공화정, 로마제국, 남북전쟁 전의 미국 남부에 대한 노예 숫자이다.

From the standpoint of the mode of production, Korean slavery was part of a system of primarily agricultural production based on private ownership of land in which both small holding peasant owners lived alongside large landlords who either rented their land to tenants or hired seasonal or daily laborers, or both. --P38

생산방식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노예제는 토지의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주로 농업생산 시스템의 일부였으며, 소작농이 자신의 땅을 소작인에게 임대하거나 계절노동자나 일용노동자 또는 둘 다를 고용하는 대지주와 같이 살았다.

All slave systems have this common feature, and the slave owner has the right to buy or sell their slaves, give them away as gifts, bequeath them to their heirs, or donate them as gifts to Buddhist temples or Confucian private academies. --P39

모든 노예제도는 이러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노예 소유자는 노예를 사거나 팔거나, 선물로 주거나, 상속인에게 유증하거나, 사찰이나 서원에 선물로 기증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In their efforts to refute Japanese contentions of stagnation, men such as Paek Nam-un and Yi chong-won eschewed Marx’s idea of an Asiatic mode of production and applied instead a Stalinist interpretation, claiming that Korea, too, had passed through ancient slave and medieval feudal stages of development. --John B. Duncan, The Origins of Choson Dynasty, P4

일본인의 정체성론을 반박하려는 노력에 백남운(白南雲), 이청원(李淸源) 등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마르크스의 이념을 피하고, 대신 스탈린주의적 해석을 적용하여 한국도 고대노예제와 중세봉건제의 발전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했다. --존 던컨 <조선왕조의 기원> 중에서

저자 제임스 팔레 교수는 미국 내 한국학의 대부이며, 조선후기 전공자로, 2001년 사망한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에서 팔레 교수로 이어지는 학맥은 ‘팔레 사단’으로 불릴 정도로 미국 학계에서 영향력이 크다.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 카터 에커드(하버드대), 존 던컨(UCLA), 마이클 로빈슨(인디애나대) 교수 등 미국의 한국사 전공자들이 그의 지도 또는 도움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외손봉사(外孫奉祀)가 성행했다

_<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한국의 유교적 변환, 1992)>

지난 6월 13일 대법원은 출생과 함께 아버지 성과 본관을 따라 ‘안동김씨’로 신고한 A씨가 어머니 성씨와 본관인 ‘용인이씨’로 바꾼 후에 용인이씨종친회를 상대로 종원 자격을 부여해달라는 청구를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종중이 부계혈족만 가능하다는 관습법의 효력이 없다는 판결이었다. 조선시대에 제사가 가장 중요한 일상의 하나였지만, 적손이 없을 경우에 외손봉사도 가능했다. 대표적인 외손봉사가 강릉 오죽헌 율곡 이이의 덕수이씨 집안으로 신사임당 부모에 대한 제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If lineal agnatic descent could be sidetracked by agnatic collaterals, it faced sure termination when its ritual concern were put into the hands of a non-agnatic descendant– a daughter’s son(oeso). Nevertheless,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dynasty, non-agnatic succession was widely practiced—often in preference of collaterals— because it corresponded to traditional familial values. --P162

적손이 방계손에 의해 따돌려지고 제사의 관심이 비부계 자손인 외손의 수중에 넘어갈 때 적손은 확실히 소멸에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왕조의 전반기에 종종 방계를 선호했지만 비부계 승계가 널리 행해졌다. 왜냐하면 이것이 전통적 가족가치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The predilection for non-agnatic ritual succession—not prohibited, but simply ignored by the compiles of the Kyongguk taejon—persevered into the sixteenth century. With ever-growing official insistence on the lineal principle, however, the ritual inappropriateness of the practice was increasingly revealed. --P163

외손봉사에 대한 편애는 금지되지 않았다. <경국대전> 편찬자들은 이것을 무시하였으나, 이 같은 관행은 16세기에도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관리들이 종법을 계속하여 주장하면서 외손봉사 관행의 부적절성이 크게 드러났다.

But ingrained customs die hard. Pat sung-jong(1562-1623), a high official at the beginning of the seventeenth century, reportedly met with general approval when he bought his younger brother a house and gave him a gift of slaves and land to perform the ancestral rites for their heirless maternal grandparents. Official records, moreover, show that non-agnatic succession survived well into the eighteenth century. --P164

그러나 뿌리 깊은 관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박승종(朴承宗, 1562-1625)은 17세기 초에 고위관리였는데, 그가 후사가 없는 외조부에 대한 제사를 지내도록 동생에게 집을 사주고 노비와 토지를 주었을 때 사회적 인정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더구나 공식 기록은 외손봉사가 18세기에도 살아남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적인 한국사학자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교수의 저서이다. 그녀는 스위스 출신으로 1959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중에 경북 영천의 양반가 후손인 조직량(1927-1966) 박사를 만나 결혼했다.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도 영천의 시댁에 왕래했으며, 그 당시 한국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으로 2020년 <추억의 기록; 50년 전 내가 만난 한국, 사진 속 순간들>을 출간했다. 저서로 <Under the Ancestors' Eyes(조상의 눈 아래서, 2015)> 등이 있다.

첩과 서얼은 조선시대의 희생자였다

_<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한국의 유교적 변환, 1992)>

고려시대에는 적서의 차별이 없었으나 조선 초기에 <경국대전>에 서자는 과거를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천민을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보니 서얼(庶孼)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조선은 노비를 양산하기 위하여 종모법(從母法: 자식이 어머니 신분을 따름)이나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자녀도 천민) 또는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허용했다. 노비나 서자의 신분해방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 가능해졌다.

A secondary wife had no parental authority over her children. As long as her master was alive, such authority was vested in him. If after his death the primary wife became the temporary head of the household, parental authority was transferred to her(chongmo). In principle, a secondary wife could not become the head of a household. --P270

첩은 자녀들에게 부모로서 권위를 행사할 수 없었다. 자녀의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 그것은 남편에게 있었다. 남편이 죽은 뒤 처가 세대주가 되면 부모로서 권력은 적모인 처에 있었다. 원칙적으로 첩은 집안의 세대주가 될 수 없었다.

Secondary sons thus were unable to climb to political prominence. Even though from the middle of the sixteenth century occasional attempts were made to alleviate the secondary son’s predicament with the argument that the state was interested in selecting officials on the basis of ability, such as initiatives largely proved ineffective. They clearly stood at cross-purposes with the yangban’s insistence on keeping descent group legitimacy and, by extension, eligibility to political power within their own group. --P272

서자들은 정치적 고위직에 올라 갈수 없었다. 비록 16세기 중반부터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데 조정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서자의 곤경을 완화하는 시도가 이따금 있었지만 거의 효과가 없었다. 서자들은 자기 출계집단의 정통성을 지킴으로써 권력에 대한 적격성을 확대하려는 양반의 주장과 분명히 대척점에 서 있었다.

Concubinage has been another bane of women in Korea, right down to the present: “the differentiation between main wives and concubines(chochop) became one of the sharpest as well as most tragic social dividing lines in Korean society.” It would be wrong, however, to think of a second or third wife as having no standing.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P63

축첩제도는 현재까지도 한국여성에게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정실과 첩실 간의 차별대우는 한국사회의 가장 날카롭고 가장 비극적인 분계선이 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부인이 아무 지위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중에서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