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배달하는 노인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2.08.19 09:00 | 최종 수정 2022.08.19 12:01 의견 0

‘집요’의 승리였다. 금융권이나 카드회사라고 판단되는 전화는 안 받는다. 대부분 “돈 좀 가져가시라”는 전화이기 때문이다. 은행에 부채가 좀 있다 보니 내가 금융권의 ‘호구’가 되었다. 나는 남의 돈이라면 지긋지긋한 사람이라 돈 빌려 가라는 소리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그 번호의 전화는 무려 5일에 걸쳐서 계속 왔다. 1544 어쩌고 하는 게 카드회사는 분명한데, 내 카드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서 다섯 번째는 기어이 받고 말았다. 카드 외상마저 못하면 내 생필품 수급이 통째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당하고 말았다. 카드 바꾸라는 전화였다. 아직 기한이 안 됐으니 싫다고 했더니 온갖 설득술이 동원됐다. 연회비도 깎아주고 적립도 시켜준다는데 너 바보냐? 이런 때 안 하는 게 이상한 거다. 뭐 이런 식이었다. 나중엔 지쳐서 그러자고 했다. 마음이 약한 탓이다. 과감하게 전화를 끊어야 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마음 다칠까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조금 전 한참 자판을 마구 두드리고 있는데, 낯선 번호가 떴다. 010이니 개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받았다. 늙수그레한, 그리고 조금 지친듯한 목소리였다.

“사장님, 회사에 계신가요?”

사장님? 아, 여기가 출판사들이 있는 곳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예, 있습니다만, 누구신가요?”

“카드 배달 왔어요. 금방 갈 거예요. 주민증 준비해주세요.”

그러고서 정말 몇 분 안 돼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사람을 닮는 게 아니라 사람이 목소리를 닮는구나. 늙수그레한 아저씨 한 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 전화 목소리대로 좀 지쳐 보였다. 이 더위가 보통 더위인가? 에어컨 아래서도 지친다는 더위에 저렇게 돌아다니려니 오죽할까. 그분이 주민증을 받아서 간이탁자에 올려놓더니 태블릿에 이것저것 기록했다. 그런데, 그 일을 왼손으로만 하고 있었다. 왜 저렇게 오른손을 아낄까? 시선을 돌리다가 흠칫했다. 점퍼의 오른쪽 팔이 비어 있었다. 감싸야 할 팔을 잃은 점퍼 소매는 바람도 없이 혼자 펄럭이고 있었다. 내 마음도 따라 펄럭였다.


“어이구! 제 이름까지 다 써주시네요?”

“그럼요. 사장님은 서명만 해주시면 돼요.”

“아까 문발동이라시더니 금방 오셨어요. 뭐 타고 다니세요?”

“차 갖고 다녀요. 그렇잖으면 이 일 못 하지요. 운정 저쪽으로 해서 교하하고 문발동 거쳐서 여기까지 온 거요.”

그분은 쓸데없이 말을 거는 사내를 귀찮아하지 않고 꼬박꼬박 대답을 해줬다.

“이렇게 다니시면 하루에 몇 장이나 배달해요?”

“딱 정해진 건 아니고요. 글쎄 70~80장? 그 정도도 정신없이 다녀야 해요. 어느 땐 100장 넘을 때도 있지만 그 정도면 하루에 다 못해요.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야지요.”

“죄송하지만 그렇게 하시면 하루 수입이 얼마나 되는데요?”

“그게, 카드회사마다 달라서 수입도 좀 달라요. 장당 1,800원에서 많은 건 2,300원까지….”

입은 말을 하고 머리는 맹렬하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평균 2,000원 잡고, 80장이라고 넉넉히 계산하면? 그리고 한 달 20일 일한다고 하면? 아! 내 계산대로만 된다고 하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리 박하지도 않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 더운 날 저 고생을 하고 다니는데, 수입마저 박하다면….

“아파트처럼 밀집된 곳이 좋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만, 거긴 주부들이 주로 해요. 차는 없고 많이 안 움직여도 되는 곳이라. 그 사람들도 일거리가 있어야지요. 내 입 좋으라고 맛있는 밥만 골라 먹을 수 있나요?”

그렇구나. 시원한 에어컨 아래 앉아, 내 밥그릇 속의 쌀 한 톨 누가 가져갈까봐 눈을 부릅뜨는 세상에, 더위를 뚫고 다니는 이분은 남의 밥 걱정을 하는구나. 자기 몸이 불편한데도 몸 성한 사람들과 나눌 생각을 하는구나. 그분을 보내드리고 집으로 들어오다가, 아차! 뭔가 놓친 것 같아서 빛의 속도로 뛰어들어왔다. 냉장고에서 물 한 병 꺼내 들고 스프린터처럼 달려나갔을 땐, 이미 그림자까지 지워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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