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암(東庵)과 서암(西庵)의 공통점이 있었다. 공문(空門)에 있어 생사문제란 바로 내가 지금 중국집에 있다면 짜장면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가 생사의 대의라는 거였다. 그런데 공(空)하다는 거였다.
중생이라면 여러 가지 세간에 분별이 없을 수 없으며, 온갖 생에 대해서도 망상이 없을 수 없고, 모든 색을 보고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점은 동암은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내(時時勤拂拭) 티끌이 달라붙지 못하게 해야 한다(勿使惹塵埃)’고 했다. 생각을 일거에 쓸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 늦은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바로 알아차리면 그 순간 사라진다고 했다.
하지만 서암의 방법은 헛된 생각이 일어나면 맞이하지도 배웅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마치 여관주인처럼 한쪽에 앉아, 장 씨가 오든 이 씨가 오든, 오면 오고 가면 가도록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청산은 늘 움직이지 않는데 흰 구름만 홀로 오가누나(靑山永不動 白雲自往來).”
선풍의 차이가 극렬하게 드러났다.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라고 했다.
동암 스님은 그런 서암 스님을 ‘오로지 공(空)이라는 것만 있지 하근기들은 진여(眞如)의 본바탕(實性)을 닦아내지 못하는 방법이고, 또한 한쪽으로 치우친 아무 것도 없는 것(空白)이라는 걸 어찌 보나?’ 하며, 참된 공(眞空)의 바탕체(理體)가 아니라며 ‘서암 노장은 구상유취, 아직 젖 좀 더 먹어야 한다’고 했다.
동암 노사는 도연에게 이러니저러니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법이 없었다. 노사가 답답하면 도연을 불렀고, 도연이 깎아준 지팡이로 땅바닥에 글을 써주었다.
“읽어봐라.”
“예. 제심일처 무사불판(制心一處 無事不辦)이라.”
“해석해봐라.”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
‘등불이 심지를 태우듯 괴로움을 철저히 알라, 확철히 괴로워해라. 그리고 어둠을 몰아내듯 한마디로 무명을 다 쓸어 내버리라’는 거였다. ‘자각각타, 각행원만, 직지인심, 견성성불이 본분사’라는 듯 이미 노사는 무위자적(無爲自適)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암 스님은 달랐다.
“염불하는 놈이 누구냐(念佛者是誰)?”
“…….”
“만 가지 생각(萬念)을 한 생각(一念)으로 바꾸어놓을 줄 알아야지.”
“…….”
“깨달음(覺)과 깨달음의 대상(所覺)이 다 공(空)하고, 공(空)과 깨달음(覺)이 더할 수 없이 원만하여 공(空)과 공(空)의 대상(所空)을 없애야지. 생기고 없어짐(生滅)이 다 없어지면 적멸(寂滅)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서암 노장은 답까지 제시하곤 했다.
일장일단은 있었다. 동암 노장은 ‘깨달음이 저 지붕 위에 있다’ 하시고, 서암 노장은 지붕 위에 깨달음이 있다면 지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까지를 논했다.
그러니 동암보다 서암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동암의 노장은 아예 이것저것 신경 쓰기 싫다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아예 꺼렸다. 동암 노장은 서암 노장을 ‘여기저기서 귀 동냥한 것들로 자기건 하나도 없이 전법도생(傳法度生)은 개코나, 그저 방편만을 내세우는 앵무새모양 죽은 소리나 내지르고 시주돈이나 받아 처먹는 제비족 사기꾼’이라는 거였다.
이근원통과 성명쌍수였다. 동암의 노장은 툭하면 ‘너희들은 지금 이 소리가 들리느냐(耳根圓通)?’ 물었고, 서암의 노장은 ‘맘공부와 몸공부를 함께 해야 한다(性命雙修, 定慧雙修)’며, ‘동암 노인네, 본래 모양이 없고 경계도 비어 물질이 아니거든 툭하면 탁자를 치고 고함을 지른다’고 서로가 ‘애꾸눈이고 절름발이’라고 몰아붙였다.
한번 만나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이가 있는 반면 금세 헤어졌는데도 보고 싶어지는 그런 인연도 있었다. 인생은 모두가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그런 면에서 들떠있던 도연에게는 두 노장 모두 거부할 수 없는 운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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