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젊은 환경미화원의 미소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승인 2022.09.02 09:00 의견 0

새벽 어스름을 디디며 산에 올라본 사람만이, 낮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머지않아 매미울음이 가벼워질 거라는 것도 안다. 이 더위도 곧 쫓겨갈 게 틀림없다. ‘아무리 더워 봐라. 내가 에어컨을 켜나.’ 다시 한번 결심을 다진다. 작업실에서 나와 큰 길가로 나서다가 그 청년을 보았다. 청소원(공식이름은 환경미화원) 복장을 한 젊은 사내였다. 얼굴은 검게 탔고 균형 잡힌 몸은 유난히 짱짱해 보였다. 요즘 '청년 청소원'이 자주 보인다. 그 또래의 자식이 있는 나로서는 늘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청년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불러세웠다. 순간 움찔했다. 혹시 분리수거를 잘못했던가? 나도 모르게 규정에 위반되는 질 나쁜 쓰레기를 버렸나? 일단 맹렬하게 반성부터 했다. 나는 평생 '공무'를 보는 사람 앞에서는 간이 작아지는 지병을 품고 살았다. 경찰이나 군인, 세무공무원은 특히 그렇다. 평생 무단횡단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새가슴이니, 함부로 죄를 지었을 리 없는데도 늘 그 모양이다.

청년이 나를 부르고서야 그 앞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상황이 파악되었다. 화를 낼만도 했다. 분리수거라고는 아예 배운 적이 없는 어느 몰상식한 ‘놈’이 저질러 놓은 게 틀림없는 폭거가 그곳에 있었다. 조금도 분리되지 않은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그나마 비닐에 넣어서 버린 것들은 음식물이 섞여 있었는지 발기발기 찢겨 내용물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비닐을 찢은 건 백설기 짓이 틀림없었다. 백설기는 이 건물을 ‘영역’으로 삼고 사는 하얀 떠돌이 고양이다. 사람이든 고양이든 앞에 있으면 한 대씩 쥐어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저걸 치워야 하는 저 청년은 얼마나 난감할까.


그가 내게 물었다. 건물에 주거하는 유일한 사람이 나고, 새벽에 집을 나서는 유일한 사람이 나기 때문에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혹시 이 쓰레기 누가 버렸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내가 관리인이 아니라 놔서.”

“이렇게 마구 버리면 안 되는데….”

그가 무춤거리며 무고한 내 곁에서 물러섰다. ‘안 되는데’로 끝나는 혼잣말이 바늘 끝처럼 아팠다. 이번엔 내가 말했다.

“누가 이사하면서 막 버리고 간 것 같아요.”

“이사요? 누가 이사 갔어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제 보니 짐을 실어가더라고요.”

떠난 자리가 깨끗해야 사람이지. 이 모양을 하고 가는 게 무슨 사람이란 말인가. 나도 은근히 화가 났다. 청년은 여전히 난감한 표정이었다. 이사 간 사람을 대체 어디서 찾아 쓰레기를 치우게 한단 말인가.

“어차피 이사 간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관리업체에 이야기해서 치우게 하세요.”

“관리업체요? 이 건물 안에 관리실이 있나요?”

“아뇨. 관리실은 따로 없지만 업체에서 대행하고 있을 거예요.”

“혹시 전화번호를 갖고 계신가요?”

내가 핸드폰을 뒤져 전화번호를 불러줬다. 그가 가까이에 와서 숫자를 받아 적었다.

다 불러주고 나서 내가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쓰레기만도 못한 것들이에요. 이렇게 버리고 가면 치우는 사람은 어쩌라는 건지. 그러잖아도 아침 시간이 바쁠 텐데… 제 집구석도 이래놓고 다니는지 원!”

내 목소리 톤이 올라갈수록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화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새벽이 돼도 더위가 가시지 않는 계절, 고단한 작업을 하다 절망스러운 상황을 만났는데, 그래도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작은 위로가 된 게 틀림없었다. 나의 그 ‘짐짓’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편들어주는 것도 보시 아니던가.

나의 의도된 ‘오버질’에 젊은 청소원의 얼굴이 기어이 꽃처럼 환해졌다. 산에 가는 길이 조금 늦어졌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만치 떨어져서 혼자 중얼거렸다. 어찌 꽃만 아름다울까. 꽃은 날마다 등을 걸어 세상을 밝히지만 저이처럼 깨끗하게 치우지는 못 하는 걸. 오늘 나는 '말'이라는 거름을 뿌려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 한 송이를 피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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