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흥업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06.06 12:33 | 최종 수정 2023.06.07 09:19 의견 0

흥업

신은숙

흥업은 늙지 않는다

KTX역이 있고 면 소재지에 대학이 세 군데

흥이 저절로 차오르는 곳

흥 UP 외치면 속도가 무섭게 따라붙지만

한결같은 메밀묵과 수타 자장면 옛날 보리밥

수그려야 들어가는 맛집 기둥엔 청춘의 낙서들

회촌엔 잠들지 않는 문학관의 불빛들

중천에 떠 있는 중천철학도서관

임도를 걸으면 대낮에도 빛나는 반닷불이들

젊은 성당과 늙은 여관이 길 하나를 마주보고 시틋한데

막막한 눈발은 흥업 사거리에 퍼붓고

끝내 버스는 오지 않는다

길을 지우며 길을 시작하는 눈조차 아득해서

흥업, 이 말을 흥얼거리면

세상에 없는 예술을 꿈꾸다

떠나간 당신도 잘 될 거란 믿음이

돌판 위 삼겹살처럼 구워진다

우리는 흥업에서 만나고 흥업에서 헤어진다

언젠가 풀리는 날 눈덩이처럼 뭉칠 사람들

당신 잘 되길 바라요, 흥업!

# 신은숙 시인 1970년 강원 양양 출생. 2013년 《세계일보》 시 등단. 시집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

# 메일로 시를 받았을 때, 첫 문장이 눈을 찔렀다.

<흥업은 늙지 않는다>

대여섯 번, 신춘문예 심사를 맡은 적이 있다. 물론 시 부문이 아니라 단편소설 부문이었다. 시인은 이 첫 문장을 찾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詩 속에 그게 보인다. 문득 다시 심사위원이 된 듯 눈을 반짝인다. 시도 그렇지만 소설도 첫 문장이 중요하다. 도입부의 첫 문장이 잘 빠지면 그 다음은 술술 잘 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설이 볼거리, 재밌거리, 얘깃거리가 있어야 하듯 시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우선 볼거리로 눈 오는 날, 폭설의 흥업 사거리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흥업은 강원도 원주시에 속한 작은 면이다. 일반적으로 읍이라면 인구가 2만 명 내외가 사는 곳을 말하고 면은 그 읍의 하위 행정구역을 일컫는다.

시인은 눈이 펑펑 내리는 거리에 서서 한 면에 세 개가 있는 대학교, 묵집, 보리밥집, 중국집 흥업면의 동서남북이나 문학관 도서관 여관 흥업 사거리를 기준으로 먹고 자고 싸고, 기도하는 곳의 상하좌우를 이야기 한다. 아마, 일요일날은 문화관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맞는 지는 모르지만).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시다. 그러나 그 그림 속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눈 밝은 독자는 금세, 아, 시인이 문화시설 토지문화관에 들어가 살다 나왔던 모양이구나, 를 간파하게 된다.

토지문화관이 무엇하는 곳이냐, 하면 스님들이 집중 수행하러 선방에 들어가 안거 하는 것 처럼 토지문화관은 문화예술 전 분야의 창작공간으로 한 달 간 숙식을 제공해 집중작업을 할 수 있게 창작실을 제공하는 곳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아마 産苦의 날들을 보낸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밤을 새우며 문장을 만들고 또 그 문장을 다듬었을까. 또 연령, 출생지, 등단지, 작품집, 작품 세계가 다르지만 창작이란 목적으로 한 곳으로 모인 시인이나 소설가, 평론가 등과 만남과 나눔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약속된 기일을 다 보내고

한 꾸러미의 원고가방을 든 채 흥업사거리에서 송별회를 마치고

<당신 잘 되길 바라요, 흥업!>하며

귀가歸家, 집으로 돌아가려고 눈 오는 폭설의 정류장에 서 있는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서서 바라보는 시골의 한 면소재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설경을 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눈이 펑펑 내리는

흥업, 흥업의 표정과 소리를 시로 그림을 그려내듯 그려낸 시를 읽으며 아마 토지문화관을 거쳐 간 예술인이라면 이 흥업이라는 시가 새삼스러울 것이다.

나도 감회에 사로잡혀 씩 웃었다. 그래서 시를 더 공감할 수 있었지 않을까. 나는 토지문화관에 들어갔던 적은 없지만 흥업에 5,6년 산 적이 있다. 80년도 중반에서 90년도 초반까지였던가. 암울했던 시절이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시를 쓰고 있다가 소설로 전환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사제리라고 배부른 산이 있는 곳이다. 전 주지가 개판 쳐놓고 간 절, 폐사나 다름 없었던 화봉암이라는 암자로 흘러 들어가 살았던 곳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어 보이는 듯 하다. 흥업사거리에 있던 성당은 거의 공소 수준이었다. 신부님도 축구를 좋아하셨었는데. 서울에서 온 학생들이 방학이면 쑥 빠져나가면 유령도시 같기만 했던 거리다. 나는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성격이 그런지라 나서거나 나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그저 썼다 지우고, 또 지우고 다시 썼던 곳. 신춘문예 예선은 올랐지만 본선에서 내리 떨어지던 시절, 이 신문사 저 신문사 투고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말없이 커피잔을 내밀던 친구 신이 있었다. 나중에 우체국장으로 은퇴한.

그리고 흥업 사거리에 서점이 하나 있었다. 고향이 서천인 대학 후배가 서점을 운영하고 있었고(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세탁소에는 기범이라는 후배가 있었다. 그 옆에 중국집이 있었고 아, 면 사무소에는 축구 좋아하던 친구, 문막읍장을 지냈던 홍이 있었으며, 흥업 파출소에 근무하던 후배 박과 일요일이면 신부님과 모여 흥업초교에서 공을 차곤 했다. 음, 또 한라대 들어가는 입구 쪽에는 kt에 근무하던 박이 살았고 그렇게 슬픔과 고통을 잘들 견뎌내며 살던 시절이었다.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다던, 인생은 소유가 아니라 사용이라며, 몸도 마음도 쓰다 가는 것이라고 한 승려가 죽음 같은 세월을 버텼던 지극히 개인적인 흑역사에 대한 추억을 소환하게 하는 시였다.

우리는 흥업에서 만나고 흥업에서 헤어진다

언젠가 풀리는 날 눈덩이처럼 뭉칠 사람들

<당신 잘 되기를 바라요 흥업!>

그리고 그렇게 살아 인연따라 흥업을 떠나왔고

<흥업은 늙지 않는다>로 낯설지 않은 곳인데 문득 흥업이 낯설어진다. 왜 조금은 아득하고 슬퍼지는 것인지. 그때 거의 무너져가던 암자, 흥업의 그 묵집, 갑자기 詩로 인해 그 묵밥이 먹고 싶은 날이다. 흥업은 늙지 않는다는데. 어찌되었든 다시 또 흥업에 폭설은 내릴 것이다. 그렇게 글 쓰며 살 수 있음에 마냥 좋았던 흥업. 언젠가는 뭉칠 우리들.

詩人의 詩로 폭설의 흥업 사거리, 그 추억을 떠올리며 새삼 멈추고 가쁜 호흡을 가다듬어 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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