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장마일기, 雲學스님과의 만남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07.18 09:00 의견 0

비가 오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만리동에 있는 배문 중학교 2학년 중퇴를 하고 입산 했었다.

인연이 되었던 은사스님이 돌아가시자, 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끈 끊어진 꼭둑각시처럼 살았다. 우울하기만 했던 날들, 그런 내게 사숙(師叔)은 작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암자는 師叔이 물려받아 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 살림은 師兄이 다 맡아했다. 그러던 어느날, 師兄이 내 재물을 싹 다 거두어 일본으로 날랐다. 말로는 유학 간다 했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미모의 보살과 줄행랑친 거였다.

암자에는 방이 세 개 밖에 없어 큰 방은 사숙(師叔)이 쓰고 공양간에 달린 방은 공양주보살님이 쓰고 꼴방은 나와 師兄이 썼었다. 師兄은 그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내가 모아 두었던 앉을뱅이 책상서랍 속의 채곡채곡 모아 두었던 내 보시금을 홀랑 가지고 달아났다. 어린 내 生에 가장 큰 돈이었다. 따져보면 그리 큰 돈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은사스님이 돌아가시며 대학에 들어가면 첫 등록금하라고 남겨주신 죽음의 전별금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낮인데도 어두운 날들로 장마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내 방에서 등을 벽에 기대고 머리를 두 다리 사이에 쑤셔박고는 하루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너 지금 그 돈 잃어버렸다고 징징거리는 거냐?>

나는 사숙(師叔)을 보자 가슴아프고 서러워 목놓아 울었다.

<노예는 그 누군가 와서 풀어주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네?>

<그놈이 네놈 공부시켜주려고 그랬나보다. 자본의 노예가 되지 말아라.>

<예?>

<너한테 처음부터 그 돈이 있었니?>

<아니요.>

<그런데 뭐 그리 슬퍼해?>

그때 師叔은 내 앉을뱅이 책상 위에 있는 시험지 노트를 보고 가져오라 했다. 그곳에 나는 매일매일 일기를 쓰고 있었다.

<내 서울 갈 일있는데 같이 갈까? 네놈 기분전환도 하고.>

<네.>

<그럼 밥부터 먹어. 아침 점심도 굶었대매? 내일 갈 때 이 시험지 노트도 가져가고.>

<왜요?>

<허허, 그놈. 말이 많구나.>

송정암


그때 만난 분이 바로 국립묘지 안의 절인 화장사의 주지였던 雲學스님이었다. 雲學스님은 師叔의 도반스님이었다.

<치부는 못 하더라도 그냥그냥 밥은 굶고 살지 않겠구나.>

<......네?>

雲學스님이 어린 나를 보고 하신 첫마디였다.

<'비 오는 밤길보다 나는 달밤이 좋다.' 나는 이 문장이 좋구나.>

<.....네?>

<나도 돌아가신 너의 스님을 존경했었단다.>

<네?>

<괜찮은 문장들이 몇 개 보이는구나. 너에겐 글이 너의 옷이 되고 밥이 될 거 같구나. 그래, 네 사형놈이 네게 훔쳐간 돈이 얼마냐? 내 너에게 그 돈을 줄터이니 앞으로 꾸준히 정진하겠니?>

그랬다. 그때는 몰랐다. 雲學스님이 동대교수이고 문학가였던 사실을. 어린 나는 스님께 물었었다.

<삶은 물음표 (life is a question mark)투성이이예요. 스님은 글을 어떻게 쓰세요?>

<나도 너처럼. 그렇게 네가 주인공이 되어 너처럼.>

<네?>

<삶은 Travel(트래블)이야. 너의 글에서 보면, 그 돈을 대학 들어가면 등록금을 쓸 때는 너무 머니까, 우선 서울에 사는 고생하시는 어머니에게 그 돈을 가져다 주려고 했다,는 부분이 있구나, 그런데 사형이 그 돈을 몽땅 가져가는 바람에 꽝이 되었다고.>

<.......>

어떤 날은 웃었어요. 어떤 날은 울고요. 어떤 날은 내가 느끼고 싶었고 어떤 날은 그냥 죽고싶었어요. 내가 없어도 세상이 잘 굴러가고 있어요. 오늘, 지금 여기 제가 살아 있는 건가요?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나는 무엇인지요? 내일은 내가 없이 시작될 수도 있을 지 모르겠어요. 제가 오늘 목매달아 죽으면요.

<Travel(트래블)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어머니가 출산할 때 겪는 산고의 고생이나 고통을 뜻하는 라틴어 Travail(트라베일)에서 유래된 말이야. 집 나오면 개고생인게 우리들 삶이야. 여기서 어머니를 집으로 보는 것이다. 살불살조는 엄마 아버지를 죽이라는 게 아니고 뛰어 넘으라는 얘기야. 그렇듯 너도 >

<......>

<어떤 만남과 나눔에는 반드시 낯설음, 두근거림 그리고 설렘이 있다. 인연이 맺어지는 사물과 대상이 있고 그렇지 않고 흘러 스쳐지나가는 것도 있는 거야. 나도 너처럼 가슴에~ 내 꿈, 내 길, 내 사람, 내 인생, 내 죽음같은 사물과 대상이 있어. 그때 그 부딫힘, 충돌되는 것들을 너처럼 마음의 카메라로 찍는 거야. 그리고 글을 쓸 때, 그사진을 풀어 얘기 해주듯 써내려가는 거지.>

<.......글짓기가 아니고 말짓기요?>

<응. 너의 눈높이로 보는 너만의 목소리. 그게 노래일 수도 있고 울음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여기 보면 ~한다, 와 ~했다,가 혼용되는데......이건 아냐. 현재와 과거가 분명해야 해. 시제의 일치라고 하지. ~한다, 로 했으면 끝까지 현재로 ~한다, 하고 ~했다, 로 했으면 끝까지 ~했다, 라고 과거로 쓰고.>

그랬다. 비가 나리는 법당 앞에 한참이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나도 나그네~, 너도 나그네~.>그랬던가. 수많은 무덤들을 뒤로 하고 나오며 나는 스님의 그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되뇌이고 또 되뇌였었다. 왜 오늘 비는 내리는 게 아니고 이리도 쏟아붓고 있는 것인지.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