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그대 그리고 나의 부처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10.24 09:42 | 최종 수정 2023.10.24 10:29 의견 0

뭐해?

아침먹고 나니 도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장난감 가지고 놀아.

무슨 장난감? 부처?

스님은 이판승이었다.

화분 가지고 놀아.

화분? 화분은 뭘 하려고?

꽃을 보여준 흙이 고마워서. 분갈이 하고 있어. 내년에도 꽃을 보려고.

무슨 꽃? 그냥 꽃. 근데 넌 뭐해?

응, 나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노인으로 단지 죽어가며 살아가고 있어.

바닷가 바위에 파도가 부딪혀 길길이 날뛰는 모양, 도반이 툴툴거렸다. 나는 징징거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래. 잘 가. 나도 곧 따라 갈 거야. 나 너의 장례식에 안 갈 거야. 물론 사십구재 때에도.

차갑게 내가 말했다. 앞으로 한 천 년은 더 살 수 있을까? 만년? 살아낸 시간보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간 사느라고 늙는다는 거, 늙어간다는 걸 감지하지 못하고 살았다.

부러워.

뭐가?

네놈이. 살아가며 죽어 가는 게. 부럽다. 상좌들도 잘 나가고. 나도 인연 함부로 좀 맺어둘 걸.

지랄 떨지 마. 너도 잘 살은 거야.

......


췌장암으로 죽음을 얼마 앞둔 도반의 말에 공감이 갔다. 도반은 강철같이 강건했었다. 반면에 나는 언제나 비실비실이었다. 툭하면 감기에 골골이라고 매번 놀림받았다.

하여 기초 노령연금 통장을 들고 나가 찍어보니 제법 되었다.

그동안 받아먹은 게 있어 스님에게 살아 있을 때 조의금을 미리 보낸다며 문자를 찍어 보냈더니, <지랄>이라는 답장이 왔다.

짜장면 값을 남기고 병원비에 보태라고 이체해 주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었다. 베푸는 마음이 이런 것인가. 누가 안분지족이라 했던가.

정오였다. 바람에 윤슬이 일렁였다. 늙음, 늙어감에 대해 생각하니 갑자기 고독해졌다. 배가 고팠는데 갑자기 허기가 싹 사라졌다. 놈을 핑계로 점심을 짜장면 먹고 강을 좀 걷기로 했는데. 입맛이 싹 사라졌다. 하여 그냥 강둑을 걷기 시작했다.

그래, 잘 가라. 바람 불면 바람으로 비 오면 비로 다시 내게로 와라.

도반은 독설가로 유명했다. 나는 이판도 되지 못하고 사판도 되지 못하는 개판의 삶을 살았다.

어쩌다 내 글을 보면, 마스타베이션하냐? 이러려면 글 쓰지 마. 그냥 읽어. 쓰는 게 기쁘고 즐거워야지, 이 글을 읽는 나까지 왜 고통스러워 해야 하니?

도반은 나보다 먼저 시인으로 등단했었다. 결국 나중에는 절필했지만.

낯설고, 새롭고, 자극적인 거, 볼 거리 얘깃거리, 느낄 꺼리, 생각할 꺼리가 전혀 없잖여. 발표한 내 글을 보고 궁시렁거리는 거였다.

너는 너 혼자만의 마스타베이션이 짜릿하지? 새꺄. 너만 혼자 황홀한 거지? 나는 안 그래. 너는 문학이라는 마스타베이션 하며 젊은 날 잘 살았잖아. 근데 난 즐기지 못하고 이렇게 헛꽃을 찾아 헤매다가 늙었다고. 난 이 늙음, 이 고통이 왜 짜증나는 거지? 망가져버린 틀어져버린 마스타베이션이 얼마나 슬픈지 너는 아니? 반면에 너는 인마, 산천경계 좋은 곳에서 살아보겠다고 화류(花柳)하며 화수(花樹)도 하고 낙유(樂遊)하며 잘 살았잖아.

새꺄, 선방에서 차려 주는 밥 처먹고 산 놈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왜 너도 함부로 인연들 좀 맺지. 그래도 난 내 밥을 내가 스스로 노동을 통해 만들어 먹으며 살았다고.

그래도 난 품위있게 살았다고.

알았다고, 잘났다고. 수고했다고.

내 말에 놈이 울먹이다 피식피식 웃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지는 몰라도 우리들에게 山은 시작이자 끝이었다. 生의 일부이자 전부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놈의 병실로 찾아가 주지 못하는 미안함에 강쪽 이편에서 산국, 노오란 들국화 하얀 억새풀을 보며 터덜거리며 걸었다.

그러다 강둑에 앉았다. 놈의 독설을 떠올렸다. 놈과 같이 앉았던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 보이는 삼합리 벤치에 앉아 눈을 꿈쩍거렸다.

봄 보지 가을 좆이라 했던가.

내가 했던 문학을 마스타베이션이라 몰아치던 도반의 표현에 낄낄거리다 <그나저나 올해 고구마 캔 놈들을 누구에게 보내지?>하며 몸을 일으켰다. 놈이 피안으로 건너가는 길, 얼마나 아플까. 결국 짜장면을 먹지 못하고 절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은 푸르러 푸르기만 했고 하얀 달만 둥그레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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