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땡중일기, 문막 장날 1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3.10.31 09:00 의견 0

나는 시골스님이다. 쓸쓸한 날이면 첩첩 산골에서 나와 場에 간다. 내 사는 읍은 오일장(五日場)이다. 3일 8일. 닷새만에 열린다. 산속에서 저주받은 토끼처럼 살다, 장날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열흘, 혹은 보름에 한 번 장에 나오면 기분이 새로와진다.

맨 먼저 움직이는 건 도서관에서 대출 받은 책을 반납하고 새로 책을 빌리는 일이다. 그 다음에는 메모장에 씌인 글들을 본다.

간장, 식용유, 휴지. 쌀, 막글리 작은 놈, 에쎄 프라임.

장날 움직일 때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야 했던 지난 날들을 생각하곤 했다. 김동리의 단편소설,《역마》의 화개장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실제로 나는 만행 중에 화개장터에 갔었고 화갯골에서 며칠 머물며 가슴이 찌르르 했던 날들이 있었다.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다. 한 줄기는 전라도 구례(求禮)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쪽 화개협(花開峽)에서 흘러 내리다 합쳐졌다.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치인 채, 호수같이 세월을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 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나간다. 그게 바로 섬진강(蟾津江)의 본류(本流)가 되는 거였다.

나는 지리산 도성사에서 내려오던 길이었다.

마치 걸망대신 엿판을 든 것처럼.

<갸름한 얼굴에 흰자위 검은자위가 꽃같이 선연한 두 눈이었다. >

김동리는 옥화를 그렇게 표현했었다. 옥화는 어디쯤 있을까. 내 눈엔 치마를 두른 이들이 모두 옥화로 보였다.

그때 나는 햇살이 따갑고, 땀이 흐르고, 목이 말라 들짐승처럼 혀로 입술을 핥았다.


오일장은 인근 여러 지역이 날을 달리하며 열렸고, 장에서 장 사이의 거리는 보통 걸어서 하루 정도였다. 보부상들은 이를 이용하여 장터를 돌며 물품을 팔았다. 장터에는 좌판을 열 공간 이외에도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주막과 같은 공간이 있었고, 장꾼들이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국밥과 같은 음식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보부상은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아울러 부르는 말로, 봇짐장수는 값이 비싸고 들고 다니기 쉬운 방물과 같은 물건을 팔았고 등짐장수는 소금, 미역, 생선과 같이 무게가 나가는 물품을 팔았다. 이러한 보부상을 장터와 장터를 오가며 산다고 하여 장돌뱅이라고 불렀다 한다.

깨달음을 구하는 내가 저 장돌뱅이들과 무엇이 다르랴. <오늘 많이 팔았어?> <오늘 많이 깨달았어?>

그날 국밥집엘 들어갔었다. 훅 하고 돼지냄새가 났다. 용기있게 국밥집을 밀고 들어섰지만 속에서 웩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나를 숨겼다. 대신 속으로 그렇다면 이번에는 봉평으로 가볼까, 하며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된 봉평장을 그려보며 막 숟가락을 드는데 그때 , 둥그런 원탁의 건너편에 허스름한 노인이 막걸리 한통과 함게 국밥을 드시고 계셨는데 <스님도 곡차 한 잔 할텨?>하고 아버지 같은 노인이 잔을 내미는 거였다.

망설이다 잔을 벌컥 마셨다. 그리고 나도 노인에게 막걸리를 찰찰 넘치게 따라 드렸다.

<음, 오늘 내가 눈 푸른 스님에게 道 한 잔 받았네. 고맙구려.>

<네?>

<.....다 보았네.>

<크으.>

어물전에서였다. 어느 노파가 고등어 한 손을 들었다 놨다, 했는데 고이춤에서 꺼낸 돈이 모자라자 돌아서자, 어물전 주인이 재수 없다고 막 욕을 하는 거였다. 순간, 속가의 엄마생각이 났다.

하여 내가 그 고등어 한 손을 샀고 부지런히 쫒아가 노파에게 그 검은 봉투를 손에 쥐어드렸다.

<아이고, 시님. 고마워 우짜나?>

<그럼 다음 생에 저 고등어 한 조각 구워 주세요.>

하고 멋쩍어 하며 돌아섰던 것이다.

<담배도 태우나?>

<......담배는 태워본지 오래 됐는데....>

아고고. 그리하여 나는 그날 이후부터 바야흐로 땡중이 되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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