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센베과자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4.05.14 09:58 의견 0

센베 과자

조현석

새벽녘 이불 박차고 나와 머리맡에 놓인 누런 봉투를 연다 부채처럼 펼쳐진 바삭한 과자를 점점이 김가루가 뿌려진 바깥부터 야금야금 부숴 먹는다 너무 일찍 일어나 단칸방 곳곳을 누비며 소란스럽던 어린 나를 위해 아버지가 간밤에 사들고 온 것이다 달콤하고 맛난, 졸린 눈을 비비며 먹는 과자 밤새 방안 가득 작업복에서 퍼져나온 비린 쇳가루 냄새가 한순간 사라진다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 말라가는 아버지를 본다 평생 노동일로 굵었던 팔다리 근육이 가늘어지고 검버섯과 주삿바늘 자국 점점이 박힌 피부가 흰 천 위로 드러난다 웅크린 몸피 작은 침대가 커지고 더 작아진 유월의 아침 평생 몸에서 풍기던 쇳가루 냄새는 불태워져 허공으로 흩어진다 엉금엉금 기어다니던 유년의 어느 새벽 가루가 된 과자 부스러기를 핥는다 아버지를 먹는다

조현석

1963년 서울 출생.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로 등단했다. 시집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 『불법, …체류자』, 『울다, 염소』, 『검은 눈 자작나무』, 『차마고도 외전(外傳)』 등을 출간했다. 도서출판 북인 대표이다.

# 5월이다. 사랑의 달이다. 고마웠던가. 감사했던가.

센베과자를 읽으니 너 나 없이 골목이 좁았던 시절, 그 어디선가 풍금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고?>

<어머니 뱃속에서 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버지 고환 속에 있었습니다.>

노사老師가 물었고 내가 대답했었다. 노사가 <지랄하고 자빠졌다.>하셔서 나는 낄낄대고 웃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노모老母에게 내가 따져 물었었다.

<어무이요, 이 세상 쓰다 남은 돈 좀 있으면 불사하게 시주 좀 하이소.>

<읎다. 너네 부처님한테나 달라캐라.>

<박 권사, 그러니까 말입니다. 나를 낳지 말지, 왜 나를 낳아 이렇게 힘든 삶을 버텨 가게 하시나요?>

<....그러게 말이다. 내 잘못 아이다. 용미리 공동묘지 가가 느네 아버지한테 가가 물어봐라. 안 그래도 니놈을 낳지 않을라 캤는데 소파수술 할 돈이 읎어가 할 수 없이 낳았다.>

<....ㅋ 낳았으면 진 자리 마른 자리 잘 보살펴야지?>

<AS기간 끝난지 언제데? 야야. 유통기한 끝난 게 언젠데 야가 이제와가 지랄을 떨고 난리냐, 난리는?>

노모의 말씀에 어이가 없어 나는 그만 기가 막혀 낄낄대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기억하기에 아버지가 충북 주덕에 살다가 무작정 상경하셔서 자리 잡은 곳이 70년대 왕십리였다. 왕십리에는 전차종점이 있었다. 한양대 근처 살곶이 다리도 기억이 난다. 그 아래 발가벗은 채 멱 감고 놀았다. 버들치도 참 많았다. 나는 전후, 베이비 부머 세대로 줄줄이 사탕처럼 이 지구상에 태어났다.

무학초등학교던가. 경상도 선산에서 살다 충북 주덕을 거쳐 서울로 전학해서 아침에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달랐다. 황당했다. 어리버리 여덟 살, 초등학교 1학년 때 월요일이었다. 내가 인사했던 아이들도 달랐다. 어찌된 일인지 당혹감에 눈을 깜빡였다. 곤혹스러워 하며 전학 온 학생이라고 말했다. 알고보니 오전반이 아니라 나는 오훗반이라는 거였다.

나는 하왕2동에 살았다. 안정사가 있었고 그 위로 해병대산이라고 하기도 했고 뽀뽀산이라고도 했다. 안정사 주위는 시장이었다. 그 산에 무허가 루삥집을 집을 짓고 꽤 오래 살았던 기억이다.

어느 날 빨간 모자를 쓴 사람들이 오함마(대망치)를 들고 와 집을 부셔버렸다. 그날밤, 비가 오는데 비닐 네 귀퉁이에 작대기를 매달아 지붕을 만들고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는 홍은동 호박골 엑스바위 아래 쪽으로 가서 다시 또 무허가 판자집을 지었다. 한 번지에 천여명이 살던 곳, 골목에는 연탄재와 라면봉지가 뒹굴고 밤이면 술 취한 이들이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싸우던 그곳에서도 빨간모자를 쓴 사람들이 와서 우리집을 부수곤 했다.

연탄재를 발로 찼다. 홍제국민학교로 2학년 때 또 전학했다. 빢빢, 까까머리에 땜통이 있었어도 검은 색 나이론 쉐타를 입고 오전반인지 오후반인지 확실히 물어보아 제때 맞춰 갈 수 있었다.

그랬다. 우리 아버지는 센베과자를 사오지 않으셨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시지 못할 용미리로 이사가셨다. 그 바람에 나는 중2를 중퇴하느라 슬펐고 그리고 중이 되느라 바빴다.

쓸쓸히 웃음 지어 보아도 누런 봉투에 마지막으로 남은 센베이 과자, 그 가루에 대한 추억, 애틋한 기억도 오늘을 사느라 돌아보지 못했다. 아마 용미리로 이사가시기 전에 울 아버지도 센베과자를 사오셨겠지...... 어머니 몰래 성경책을 쭉 찢어 둘둘 담배를 말아 태우시던 울 아버지...... 바삭한 흙가루 다 되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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