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적심(摘心), 고추 방아다리 따기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4.06.04 08:25 의견 0

"음, 고추가 많이 컸네."

앉을뱅이 동그란 의자를 놓고 고추밭에 앉았다. 올해, 고추는 그리 많이 심지 못했다. 고추 모종 여덟 판을 심었다.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슬픔(悲)이며, 지혜는 내 멍에다. 호미, 부끄러움은 괭이자루이며, 의지는 잡아주는 줄, 생각은 호미날과 작대기이다."

뻐꾸기들이 학명스님이 쓴 선원곡을 읇조려대며 운다.

뻐꾹뻐꾹, 뻐꾹이가 울거나 말거나 고추밭의 고추들 곁순치기를 해준다. 헌데 하늘이 너무 푸르다. 하얀 구름도 두둥실 떠간다. 순간, "내가 뭐하고 있는 거야?"하다 풀썩 웃었다.

고추, 곁가지, 곁잎을 따주는 걸, 방아다리를 딴다, 고 한다. 한문으로는 적심(摘芯)이라 하고. 생육중인 작물의 줄기 또는 가지의 선단부분의 생장점을 잘라주어 분지수를 늘이거나 생육을 촉진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순자르기를 해줘야 나무가 튼실하고 열매가 많이 열리는 것이다. 적심을 해주지 않으면 땅에서 나쁜 균이 올라와 부실해지거나 병들 수 있는 것이다.

불가에서도 같은 유의어가 있다. 마음챙김의 방법 중 망상번뇌를 덜어내는 걸 적심(摘心)이라 한다. 적심(摘心)은 순지르기와도 같다. 번뇌의 줄기를 잘라 해당 망상줄기의 생장점을 제거하여 다른 가지를 건강하게 유도하는 것. 혹은 결실기에 접어든 식물의 생장을 인위적으로 중단시켜 마음의 열매를 크게 맺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안거 입제를 할 때면 심을 거 다 심고 한마디로 솎아내기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고춧대에 첫 줄을 매주는 것이다. 고추가지가 퍼지고 주렁주렁 열려 고춧대가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쓰러지거나 부러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진드기, 응애가 출몰하는 시기이므로 첫 방제작업을 해준다.

마음도 그렇다. 병들지 않으려면 방제를 잘 해야 한다. 마음을 잘 지키고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휘둘리지 않는다. 걸러내지 않은 마음에서 거친 말, 탐욕, 노여움이 거개는 惡業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만든 행복이겠지."

손에 낀 장갑을 벗고 허리를 펴고 일어선 채 머리를 득득 긁었다. 이제와 인생을 바꿀 수는 없고 그저 바다로 여행이나 훌쩍 떠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농사고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다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들썩이던 마음을 덜어내고 대신 허리를 펴고 일어선 김에 산책길을 나섰는데 절로 들어오는 쪽 개울가에 바위 하나가 눈에 와 박힌다.

어느 절이었던가, 젊은 날 만행하던 시절 적심대(摘心台)라는 바위가 있던 암자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바위를 한참 바라본 적이 있었다.

방아다리를 따면 그 날은 나물 만들어 먹는 날이다. 대개 이 작업은 모내기가 끝나고 여름이 접어든다. 하안거에 들고 쯤 망종 때의 일이다. 데쳐서 묻혀 나물로 먹으면 기가 막히다. 고추장 넣고 커다란 양푼에 썩썩 비비면 더 맛있다.

불가에서는 사바를 심전(心田)이라 한다. 마음의 본바탕? 심지(心地),마음자리라 하기도 하는데 마음이 지혜와 복덕이 자라나는 밭과 같다는 뜻에서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렇게 고추농사해서 상좌 두 놈 대학 보내고 오막살이 초암으로 주지살이 내보냈는데. 옛날에는 그래도 펄펄 날아다녔는데. 이제 나만 먹고 살면 되는데. 왜 이리 허리가 아픈지. 그렇다고 묵정밭으로 둘 수는 없고 사브작 사브작 하는 데도 이제는 버겁다.

흔히 전농전선(全農全禪)이니 농선불이(農禪不二)니 하는데 다 개뿔이다. 간경(看經)할 때나 염불할 때나, 좌선할 때는 좌선해야 한다. 하루 일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一日不作 一日不食)라고 백장 선배가 말씀하셨지만 놀고 먹어서는 안된다 는 것을 알지만 살다보면 놀고 먹는 날도 있어야 한다. 때로는 천천히 살기도 해야 한다. 어정거리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주경야선(晝耕夜禪)을 해본 사람은 안다. 낮에 일해 놓고 밤에는 선을 한다? 웃기는 얘기다. 악착같이 전농전선(全農全禪)이니 농선불이(農禪不二)니 한 건 첩첩 산중에서 먹고 살 게 없어서 그리 했던 것이다. 이제는 낮에 일하면 밤에 떨어져 근육통으로 끙끙 앓고 곯아 떯어져 자기 일쑤다.

그렇게 무시선 무처선이라 했던 나도 나이가 드니 별 수 없다. 사는 게 농사랑 다를 바 하나도 없다. 그래도 가을에 옥수수며 고구마 추수할 게 있어 얼마나 좋은가. 아무래도 고추 줄 다 매면 바다에 한 번 다녀와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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