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장마, 장대비를 바라보고 있는 너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4.07.23 09:00 의견 0

관시하인(觀是何人)

심시하물(心是何物)

그대는 무엇을 보는 놈인가?

보고 있는 너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어느 우기, 걸망끈이 어깻쭉지를 파고 들 쯤이었다. 삼십 대 초반이었고 신원불명, 주거부정의 만행중이었다. 슬픔과 허기짐에 지친 비들이 꼬리를 휘휘 돌리며 주룩주룩 내 청춘 속으로 쏟아지는데, 고속버스터미널에 비를 그을 수 있는, 발끝으로 빗물이 떨어지는 낡은 나무 긴의자에 앉았었다.

"어디 계세요?"

그때 옆에 있던 내 나이 또래 삼십 대의 미모의 여자가 물었다

"나 여기 있어요."

내 말에 픽 웃으며 내 눈을 쳐다보았다.

"어느 절에 계시느냐고요?"

나는 속으로 '옳지. 고기 한 마리 걸려들었다.' 했다. 치기와 똘끼로 만렙되어 있던 젊은 날이었다.

"우여곡절이라는 절 알아요? 지금 제 절이름이 우여곡절의 허공사에요. 천상천하에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 무엇이든 다 가질 수 있는 허공사?"

"예전에 미처 모르던 절이네요."

"네. 허공에 있는데 구름 위 천상이라서 발 한 번 잘못 내딛으면 이렇게 천길만길로 떨어지는 절이죠."

요석공주를 바라보던 원효의 눈빛으로 내가 보살을 건네보았다.

"내 머물 절을 찾아 다니고 있어요. 아마 그 절이름이 아뿔사, 라던가? 설움과 그리움으로 점철된 절이죠."

여자가 어이없다는 양 실실 웃었다. 절은 많았다. 그러나 내가 머물 절은 없었다.

"아뿔사 옆에는 그럼 그럴사도 있겠네요."

"그렇죠. 시주 좀 하시죠? 부끄럽고 창피하긴 하지만. 그럴사 밑에는 뼉주암도 있고요. 시주를 좀 해주시면 절 하나 지으려고 해요."

"시주? 무슨 절?"

"네, 더 늙고 병들기 전에 열반터를 하나 장만하려고요. 나같이 신원불명, 주거부정의 떠돌이들, 누구나 오면 숨겨 줄 수 있는 곳요. 그 누구도 오라가라 하지 않는 곳. 외롭고 쓸슬한 사람들이 와서 마음놓고 자고 갈 수 있는 곳이요. 창호를 어디로 내도 상관 없는 요. 절 이름은요? 핍박사라고. "

"버스 올 때까지는 아직이니 법문 한 자락만 들어보고요."

"법문요. 아 그렇군요. 에헴, 그럼 노가리, 썰 한번 풀어볼 게요. 굶주림보다 더한 병은 없고, 몸이 있는 것보다 더한 고(苦)가 없으며, 열반에 이르는 것보다 더한 낙은 없다. 또한 무병(無病)은 가장 큰 이익이요, 자족(自足)이 가장 큰 재물이요, 신뢰가 제일 가는 친족(親族)이요, 열반이 최상의 안락이다."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저는 겉모습만 보고 스님이 땡중인줄만 알았어요."하며 여자가 감탄했다.

"땡중 맞아요."

"어디 가세요?"

"서울가요."

"뭐하시러?"

"몸이라도 팔아 돈 벌려고요."

"돈 벌어서는 뭐 하시려고요?"

"누가 오라가라 하지 않는나만의 해방구를 만들려고요."

"웅얼거리시던데 무슨 經은 무슨 經이세요?"

"개판 반야심경이라고, 들어보실래요? 안 주면 가나봐라, 안 주면 가나봐라."

짐짓 목소리 낮게 깔고 독백조로 염불을 심각하게 해대자 여인이 깔깔대고 웃었다.

"서울엔 왜 가시려고요?"

"제가 있던 곳은 공기가 희박하고 땅에는 점차 디딜 곳이 사라져 가네요. 일단은 보살님의 자비와 긍휼로 여비를 마, 마련해 수도(首都)로 가보려고요. 올곧은 수도승(修道僧)이 되질 못했으니 저도 수도승(首都僧)이라도 되어보려고요."

"히이. 제가 보긴 스님은 아직도 한참이나 더 헤매실 거 같으시네요. "

"네. 즐거움과 괴로움이 모자라서죠. 일단은 여기 이렇게, 난장 깔 수 있는 고무판, 비닐하고 침낭, 찌그러진 냄비, 버너가 있으니 있으니 걱정이 없어요. 그렇다고 보살님이 섰어봐라 주나봐라 섰어봐라 주나봐라,하심 안됩니다."

"......."

"저는 지금 간절해서 간절암, 절박하니까 절박사 주지로 여기 있으니까요."

그때 보살이 지갑에서 만 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 내게 내미는 거였다. 하루 세끼 물배로 채운 날이었다. 하여 만원 권 다섯 장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장맛비는 죽죽 내리는데 뒤꿈치는 들고 이따끔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둠칫둠칫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하여 빗속에서 어푸어푸 허우적이며 추던 춤을 멈추고 나는 때절은 걸망에서 천천히 고통을 음미하듯 검은 봉다리 하나를 꺼내 보살에게 내밀었다.

"뭐예요?"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걸망을 울러매고 돌아섰다. 그리고 터미널 앞의 국밥집을 향해 내치 걸었다. 봉다리 안에는 1키로도 넘는 능이 버섯이 들어 있었다. 순간 "맛있게 먹을 게요, 스님."하더니 여인이 벌떡 일어나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합장배례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련없이 빗속에서 손을 들어 빠이빠이를 해주었다.

그리고 삼십 년이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만큼 와 있는 건지.

무엇을 하는 놈인지?

뭔가를 하고 있는 너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가만히 내가 나에게 묻다가 쓸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저 창문을 연 채

장대 같은 장맛비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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