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는 진인은 莊子의 진인과는 조금 달랐다.
젊은 날, 진인이 진짜 있을까? 깨달은 이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진인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군사정권 아래 가증스럽고 토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진인, 도인은 만나지 못했다. 진인, 도인이라고 했지만 거개가 비현실적인 인물들이었고 정신 나간 이들이거나 괴물, 그저 괴짜거나 별종들이었다. 진인은커녕 순 도둑놈들이었으며 사기꾼 미친놈들이 대부분이었다.
선방, 지대방에 도는 이야기들은 거의가 정확했다. 각 지역에서 모인 수좌들의 판단은 옳았다. 일상, 여자관계, 재물상태가 너무 빤했다. 가야산 진인, 지리산 진인, 설악진인, 무등진인, 계룡진인. 거개가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진인, 현자, 성자, 미륵, 메시아. 진인이 없지는 않았다. 간혹 道를 이룬 분들도 있었다. 은둔자들 속에 가뭄에 콩나듯. 그러나 정작 진인은 사람들 속에서 할 도리를 하고 사는 무명의 수행자들, 이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진인이라는 걸 안 건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서였다.
나도 진인이 되고자 했었다. 그러나 수행자로 산다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남루하기만 했을 뿐, 상구보리를 외친다 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치솟는 물가도 어쩔 수 없었으며 병들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위로도 되지 못했다.
그래도 상구보리는 어느 정도 자신 있었는데 하화중생은 애초부터 자신 없었다.
그래도 희망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쓸모가 있었던가.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다.
"어디로 가지?"
지금까지의 여정도 버거웠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지금까지가 아니라 지금부터인데.' 낮게 한숨을 삼켰다 삶의 의미가 있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어야 할텐데. 그렇다면 먼저 어머니, 아버님을 뵙고 싶었다. 용서를 받고 싶었다.
비가 오다 말다 퍼붓다가 말짱하다를 반복하던 장마가 끝났을 쯤이었다.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하던 길이었다. 그때는 파주 금촌 문산 등 서북방면 노선의 버스를 타려면 불광동으로 가야했다.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로 불렸지만 실제 위치는 불광동이 아니라 대조동이었다.
광탄 용미리행 버스를 타려 했던 것이다. 터미널에 도착해보니 열시였다. 용미리행 버스는 아홉시 사십 분에 출발했고 다음 차는 열한시 반이었다.
더럽고 나프탈린 냄새나는 터미널 화장실에 오줌을 누고 나왔다. 순간, 건물 한귀퉁이에 매점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망설였다. 북어포 하나와 새우깡, 그리고 크림빵 두 개 종이컵, 사홉들이 소주,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사이다 한 병 샀다.
인연을 싹둑 잘랐다. 부모를 버리고 친구들도 버리고 색깔 있는 옷들도 버리고 집과 세상의 인연을 떠났던 몸이었다. 그랬다. 이욕(離慾)의 날들, 세속적 권력과 안락한 가정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용미리 시립 공동묘지로 가는 길이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흥얼거리다 '잘못 온 길인가, 이젠 어떻게 하지? ' 했다. 밤을 세워 세속으로 달려오기는 했지만 '서울, 서울, 서울.'하며 다시 수도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아침도 먹지 못했다. 그러나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맛있겠어요."
버스가 출발할 시간을 기다리느니, 잠시 근처를 돌아보자고 나섰던 길이었다. 대조동, 대조시장 뒷길에 집 짓는 곳이 있었다. 가슴까지 돌담으로 되어 있는 집이었는데 그 안에 인부들이 참으로 라면을 먹고 있었다.
현장인부들과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내가 말을 던졌던 것이다. 집을 짓던 인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라면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모두 다섯 명이었다.
"일루 들어와요, 스님."
일 하시는 분들이 손짓하며 나를 불렀다. 나는 두 손을 얼굴 쯤으로 들어 올려 합장을 해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라면에 소주, 막걸리를 먹는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평상시에 낯가림이 심하고 사회성이 부족했던 내가 성큼 그 집짓는 현장으로 선뜻 들어선 거였다.
"소주, 막걸리?"
"곡차는 됐고요....... 라면이 먹고 싶으네요...."
"스님, 머리 한번 만져봐도 돼?"
".....그러세요."
이십대였던 나는 맨머리를 내밀었다. 그러나 말만 그렇게 했을 뿐 나의 머리는 만지지 않았다. 다들 나보다 연상이었다.
그렇게 라면과 소주 한 잔을 얻어먹고 밥값을 한다고 웃도리를 벗고 이거저거 심부름을 해 주었던 것이다.
마당의 펌프에서 물을 푸기도 했고 시멘트를 삽으로 개어주었고, 벽돌을 날라다 주기도 했다.
"스님 해봤어?"
삼십 대가 내게 물었다.
"뭘요?"
"해봤냐고?"
"앞으로도 해봤고 뒤로도 해 봤죠."
"뭘?"
"반야심경이요."
나의 말에 일하시던 분들이 모두 킬킬대고 웃었다.
"스님 아슈?"
"뭘요?"
십장인 아버지 격인 목수가 벽돌을 쌓은 곳에 나무로 된 현관 문틀을 세우다 묻는 거였다.
"일반주택도 그렇지만 아파트 현관문 크기에 규격이 있다는 걸."
"....."
몰랐다.
또 하나, 목수가 집 짓는 데 수직과 수평을 잡는데 여간 고심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어르신?"
"그렇게 수평을 잡는 이유가 뭐예요?"
"스님,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알아요?"
"예."
"멀미하지 않기 위해서에요. 수평은 평화를 의미해요."
"네?"
"사람이 죽어 나가거나 폐가가 되는 집 거개는 수평을 이루지 못해서예요."
"........."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일이 끝났다. 여비 하라며 한나절 개잡부로서의 품값을 받았다. 다섯 시 반에 용미리 행 버스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오전에 가고자 했던 용미리를 향해 가는데 그만 소낙비가 내리는 거였다.
순간, 공사장 현장이 떠올랐다. 시멘트며 다루끼(목재), 비를 맞으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나는 망설이다 돌아섰다. 그리고 바쁘게 걸음을 놓았다.
"스니임!"
그렇게 다시 현장에 도착해 천막으로 시멘트며, 나무 각재들을 덮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야지, 대목수였던 거였다. 그리고 이어 하나 둘 씩 낮에 일하던 다섯 명이 모두 현장으로 돌아온 거였다.
"우리 다시 모인 김에 회식이나 할까?"
나는 그 말에 '좋죠'하며 '제가 내죠.'하고 걸망에서 북어포 하나와 새우깡, 크림빵, 종이컵, 사홉들이 소주, 그리고 사이다 한 병을 꺼냈다.
그렇게 나는 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랬다. 그날, 비만 오지 않았다면 우연찮은 경험, 그저 이색적인 경험으로 끝났을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진실은 경전의 문자에 있던 게 아니라 문자를 벗어난 그 마음, 그 뜻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도 가끔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이면 그때 그 날, 그 아름다웠던 진인들을 떠올리며 행복에 잠기곤 한다.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