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범 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1.09.28 22:19 | 최종 수정 2021.09.29 09:39
의견
0
그림 : 정운자/시인ㆍ수채화가
문 : 무엇을 훔치러 왔느냐?
중암(中庵) 위에 감태나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올랐을 때였습니다.
노사(老師)가 물었습니다.
답 :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를 물으시는지요?
문 : 그건 아느냐?
답 : ‘독유일물상독로(獨有一物常獨露) 담연불수어생사(澹然不隨於生死)’. 아직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있어 초연한 자연의 생사를 따른다’에 이르지 못합니다. 여기 벼락 맞은 감태나무가 있다 해서 보보시도량(步步是道場)으로 올라왔습니다.
문 : 지팡이는 뭐할라꼬?
답 : 다음 달에 스님 생신이라 들었습니다. 세 분 스님들께 선물하려고요.
문 : 연수목이라, 일족삼례(一足三禮)다. 지한장안(地限場限, 오늘 지금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뜻)하거라. 그나저나 네놈이 만든 그 지팡이로 많이 맞을 텐데.
답 : 그러면 지팡이가 주장자(柱杖子)가 되는 거죠, 뭐.
문 :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답 : …톱입니다.
문 : 그러면 내 묻겠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괴고 아래로는 땅을 고였다. 밝기로 말하면 태양과 같고 검기로 말하면 칠통과 같다. 항상 동용중(動用中)에 있으되, 동용중에서 목부득(牧不得)하니, 이것이 무엇인고?
답 : …일물(一物)이 본원(本源)이요, 불성(佛性)입니다.
문 : 에이, 이 흉내나 내는 원숭이, 말만 잘하는 앵무새 같은 놈아. 삼십 방이 아닌 게 다행인 줄 알아.
그때, 노스님은 학인(學人)의 머리통을 짚고 계시던 지팡이로 ‘딱’ 소리가 나도록 때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없이 돌아섰습니다. 학인은 그동안의 수행이 노스님의 '한 물건이라'하는 물음의 걸림에 그만 훅하고 다 날아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수그리는 순간순간 ‘잠연공적 본무일물(湛然空寂 本無一物, 맑고 빈 적멸에는 본래 한 물건이 없으니) 영광혁혁 통철시방(靈光爀爀 洞徹十方, 신령한 밝은 빛 온 누리 비추이네)’라고 노스님이 땅바닥에 지팡이로 써놓으신 글씨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