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안내】 바라밀다의 포구에서 신 한 짝을 남긴다

맹난자 <까마귀>(북인수필선 2)

고양투데이 승인 2021.05.12 16:59 의견 0

팔순 앞두고 수필인생 50여 년을 정리한 맹난자 수필선집

한국 수필계의 원로 맹난자 수필가가 팔순을 앞두고 수필인생 50여 년을 정리하는 수필선집 <까마귀>(북인수필선2)를 출간했다. 맹난자 수필가는 자신의 수필선집 제목을 왜 ‘까마귀’로 정했는지를 암시하는 시 같기도 하고 화두(話頭) 같기도 한 짧은 글을 ‘작가의 말’에 남겼다.

“잊을 만하면 머리맡에 와/ 내게 할(喝)을 던지는 까마귀/ 그 일구(一句)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목 쉰 매미처럼 내 뜨거운 삶을 사랑하며/ 어느새 팔십 노구에 이르렀다// 눈물이 나도록 맑고 시린 저 겨울하늘/ 하늘과 나 사이에 아무런/ 간격이 없다// 이제 바라밀다의 포구(浦口)에서/ 신 한 짝을 남긴다.”

제1장 ‘내면일기’에서는 팔순의 몸이 되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인생의 여름 같은 지난 시절을 돌아보는 ‘산책’, 사회 초년병 시절 동생들과 맞았던 어머니 사십구재 즈음을 회상하는 ‘추석 무렵’, 신혼 시절의 허기를 채워주고 때론 추위마저 녹여주던 마력을 지닌 차 이야기 ‘찻물을 끓이며’, 아버지 같은 스승이었던 오영수 소설가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흰 구름이 흐르던 언덕’ 등을 만날 수 있다.

제2장 ‘몸을 붙들고’에서는 따스한 우유 한 잔과 인절미 서너 개만으로도 간단하게 아침식사가 되는 비우는 삶의 상징을 표현한 ‘노년의 식탁’, 운문선사의 화두인 ‘똥막대기’에 대한 명상글 ‘간시궐’, 저자의 노화한 몸과 20년이 넘어 누수현상을 일으키는 냉장고에 빗댄 ‘냉장고의 눈물’, 인생의 고(苦)를 잊게 하는 바람 부는 언덕에 선 채로 외치는 ‘나, 이대로 좋다’, 흐르는 강을 보며 진지하게 시간을 사유하는 ‘시간의 강가에서’ 등을 모았다.

제3장 ‘모과 한 알’에서는 ‘홍시’, ‘모과 한 알’, ‘벌레’, ‘코스모스’, ‘별’, ‘물에 관한 추억’ 등 여러 사물과 유기체인 미물에서부터 인간까지 존재 의미를 탐색한 ‘단편수필의 정수’를 만나게 했으며, 1부터 10까지 각 숫자의 상징과 의미를 되짚어보는 ‘수(數), 이미지의 변주’라는 독특한 수필 또한 보여준다.

제4장 ‘문학의 힘’에서는 코로나19시대에 비대면과 봉쇄로 갇혀 지내는 시대변화에 맞춰 문학, 특히 수필도 변해야 하는 당위성을 역설한 ‘Covid시대, 문학의 기능과 사유의 힘’을 비롯해, 수필문학의 앞날을 위해 수필가들이 해야 할 일들을 상세하게 기술한 ‘붓 한 자루’, ‘책은 책으로 읽어야 한다’, ‘수필에 대한 나의 반성’, ‘수필가여 피로 써라’ 등에는 평생 수필 쓰기에 힘써온 저자의 문학과 수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제5장 ‘고타루의 오두막에서’는 1996년 10월 27일 음력 보름 간월도(看月島)에 가서 이백과 소월의 시, 선가의 화두인 ‘견월망지(見月忘指)’에 대해 쓴 ‘간월기행’, 죽기 며칠 전 스스로 제문 ‘만가’를 지은 도연명을 기억하는 ‘길 떠나야 할 나그네’, 인터넷 바둑을 두는 남편의 착점 소리에서 떠올린 두보의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무욕의 성자’ 알베르 카뮈의 문학에 경배를 올리는 ‘신(神) 없는 성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역작 <주역에게 길을 묻다>, <그들 앞에서 서면 내 영혼의 불이 켜진다>의 서문(작가의 말) 등에서는 동서양 철학자와 사상가, 예술가들을 기린 글을 읽을 수 있다.

지혜경 연세대 철학연구소 연구원이자 철학박사는 수필가 맹난자를 “철학수필이라 불릴 만한 글이 드문 한국문학계에서 철학수필의 전범을 제시한 작가”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긴 구도의 여정 끝에 맹난자는 말한다. 봄을 찾아 헤매 돌던 나그네가 제 집 매화나무에서 봄을 본다고 하듯, 나 또한 작가들의 묘지를 돌며 죽음을 찾아다니다가 고희를 훌쩍 넘긴 이즘에서야 내 몸 가운데에서 태극을 본다. 생사(生死)란 음양의 순환이요 다만 자연의 변화인 것을.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처럼, ‘인생 그것은 어차피 환(幻), 종내는 공(空)과 무(無)로 돌아가리’라던 그와 마음을 합한다. ‘문학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오른 작가들의 지고(至高)한 정신과 만나면, 문학이 곧 구도의 여정(旅程)임을 알게 된다’는 그녀의 말처럼, 맹난자의 수필은 문학이 구도(求道)의 여정임을 우리에게 증명해주고 있다”고 썼다.

_맹난자 수필가

서울에서 태어나 숙명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국대 불교철학과를 수료하였다. 1969년부터 10년 동안 <월간 신행불교> 편집장을 지냈으며, 1980년 동양문화연구소장 서정기 선생에게 주역을 사사하고 도계 박재완 선생과 노석 유충엽 선생에게 명리(命理)를 공부했다. 능인선원과 불교여성개발원에서 주역과 명리를 강의하며 월간 <까마>와 <묵가>에 주역에세이를 다년간 연재했다. 2002년부터 5년 동안 수필 전문지인 <에세이문학> 발행인과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을 역임하고 <월간문학> 편집위원과 지하철 게시판 <풍경소리> 편집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수상록 <본래 그 자리>(2016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수필집 <빈 배에 가득한 달빛>, <사유의 뜰>, <라데팡스의 불빛>, <나 이대로 좋다>, <시간의 강가에서>(2018년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선집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에 대하여>, <만목의 가을>이 있으며, 역사 속으로 떠나는 죽음 기행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와 개정판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기억하라>, 작가 묘지 기행 <인생은 아름다워라>, <그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Ⅰ·Ⅱ), 그리고 <주역에게 길을 묻다>(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 선정)와 일어판 <한국 여류 수필선> 외 공저 다수가 있다.

현대수필문학상, 남촌문학상, 정경문학상, 신곡문학 대상, 조경희수필문학 대상, 현대수필문학 대상을 수상했으며, 지금은 한국수필문학진흥회 고문, <에세이스트> 편집고문, <문학나무> 자문위원,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문인협회 상벌제도위원장을 지냈고, 문화일보에 ‘한 줄로 읽는 고전’을 연재 중이며, <The 수필> 선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_책 속으로

‘까마귀’ 중에서

1.

집에서 입던 채로 나와 횡단보도를 두 개 건넜다. 공원도 오랜만이다.

겨울 숲은 저만치 물러나 있고 하늘은 겨울답게 맑고 청랭하다. 걸음이 틀려져 조심스레 천천히 걷는다.

까 - 악 까 - 악! 허공에 사선을 그으며 지나가는 소리. 흉조(凶鳥)라지만 울음 끝이 가파르지 않은 게, 왠지 맑은 하늘에 비행운(飛行雲)처럼 묘한 여운을 남긴다.

초등학교 1학년, 원서동 우리 집 위 골목에 고모네가 사셨다.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면 담 아래 탐스런 수국이 피어 있고 뒷동산에는 찔레꽃 향기가 코를 찔렀다. 비 오는 날이면 고추장떡을 얻어먹을 수 있고, 고모부는 나를 번쩍 들어 “우리 쩔레, 서울구경시켜주지!” 하며 공중에 한참을 떠 있게 해주었다.

“날아가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마라….” 고모부는 난간에 앉아 왜 이 노래를 흥얼거리셨을까? 이 구절이 기억에 남아 유리조각처럼 가슴에 박힌 지 70성상이 되었다. 그분은 6·25때 납북되셔서 매형을 잃은 아버지만큼이나 나도 슬펐다.

5학년쯤이던가, 작문시간에 나는 이 구절을 종이에 써놓고 어둠속 우물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시참(詩讖)이라더니 당신의 운명을 예견이나 하신 듯하다.

까 - 악! 빈 가슴을 긋고 지나가는 배음(背音).

그만 눈을 감는다. 예전의 그 시간 속, 심연의 바닥에서 인화지 한 장이 피어오른다.

(중략)

5.

그의 유택을 다녀온 지도 어느새 17년이 지났다.

“이제 더 이상은…?” 눈짓으로 내게 말하던 가와바타보다 나는 두 살을 더 살고 있다. 누워서 지내는 날이 많아진 요즈음, 거실 창밖에 눈을 두면 빈 목련 나뭇가지에 포르륵 새들이 머물다 떠나곤 한다. 포의 집에서 만났던 그 참새 떼 같기도 하고, 내게 무슨 전언(傳言)이라도 있는 듯 보인다. 흑단처럼 새까만 까마귀란 놈은 허공에서 소리만 들려준다. 이태준은 ‘까마귀’의 울음을 ‘까르르…’ 하고 GA 아래 R이 한없이 붙는 발음이라고 했는데, 오늘 아침의 까마귀는 ‘깍 깍 깍’ 급하게 세 음절을 꺾는다. 가라는 뜻인가? ‘가 가 가’로 들린다.

노년은 이제 소리도 몸으로 듣는다. 목탄화로 그려진 창밖 풍경, 그것도 내게는 가설무대의 배경 같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감는다. 흑단새 한 마리,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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