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별곡】 우리들의 마음을 무엇으로 안심시킬까요

유성문 주간 승인 2021.07.04 09:11 의견 0

김용택

오늘은 장마로 불어난 강을 건너

집에 가야겠다.

강을 건너 벗은 신을 들고

심어논 벼들이 돌아앉는 논두렁을 지나면

삽을 메고 논 가득한 벼를 바라보며 서있는

아버지 곁에 서보려 한다.

-올해는 벼들이 일찍 깨어나네요

-그렇구나

쌀보다 나락을, 나락보다 논 가득한 벼를

벼보다 겨울논을 더 좋아하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농사는 언제나

논에서 풍년이고

논 밖에서 흉작인데

내 농사는 논 밖에서 풍년이고

논 안에서 흉년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비는 아버지 일생의 피이고

내게서 비는 저 흐린 허공의 비애입니다.

-집에 가자

-예 아버지

아버지, 논으로 울고 논으로 웃고

논으로 싸워 아버지의 세상과 논을 지키신 아버지

아버지의 적막하게 굽은 등이

오늘따라 왜 이리 넉넉합니까

집에 들면 강 건너 밭 지심을 걱정하시는

어머님 곁에 앉으셔야

맘이 놓이시는 아버지

우리들의 아내는 우리들의 마음을

무엇으로 안심시킬까요

아버지.

_시집 <섬진강>(창비시선46,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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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인가, 지리산길에서 김용택 시인과 도법 스님이 만났다. 한 주간지의 창간 기념 특집으로, 당시 새로 길을 열어가고 있던 지리산 둘레길에서 생명과 자연에 대해 대담하는 자리였다. 마침 장마를 앞두고 지리산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시인은 ‘날이 참 맑고 좋다’고 말했다. 비 오는 날을 ‘맑은 날’이라 표현하는 시인의 마음이 새삼 각별했다. 시인은 지리산 논두렁길을 거닐면서 ‘걷는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과 대화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논처럼 너른 생명의 바탕이 있을까. 사람의 땀과 눈물이 스민 논이야말로 삶의 바탕이며 그릇 아니겠는가. 그 논을 지켜온 사람들의 뒤켠에서 걱정밖에 할 게 없는 우리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우리는 우리들의 아내를 무엇으로 안심시킬 수 있을까. 늦은 장마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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