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 흐르지 않는 물, 오를 수 없는 산 - 2

_대암산과 해안분지

유성문 주간 승인 2021.07.08 00:14 | 최종 수정 2021.07.08 00:17 의견 1

늪을 지키고 섰는/ 저 수양버들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소금쟁이 같은 것, 물장군 같은 것,/ 거머리 같은 것,/ 개밥 순채 물달개비 같은 것에도/ 저마다 하나씩/ 슬픈 이야기가 있다// 산도 운다는/ 푸른 달밤이면/ 나는/ 그들의 슬픈 혼령을 본다// 갈대가 가늘게 몸을 흔들고/ 온 늪이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을/ 나는 본다 –김춘수 <늪> 전문

육지 속의 바다, 파로호에 한쪽 발을 딛고 있는 양구는 산야마저도 군복색이다. 누구는 ‘파로호는 수반어반(水半魚半)이고 양구는 민반군반(民半軍半)’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구절양장 길을 돌 때마다 어김없이 초소가 나타나고, 숱한 능선에는 우뚝한 전적비(戰績碑)가 박혀있기 십상이다.

대암산 용늪 ⓒ유성문(2004)

그 지루한 군복색이 키워온 것은 비단 전쟁의 상처만은 아니었다. 그 군복의 날선 주름 밑으로 자연은 은밀히 생태의 숨결을 감춰놓고 있었다. 대암산과 대우산 일대의 천연보호구역은 포화가 멈춘 뒤 자연이 어떻게 생명을 이어가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이 철저하게 파괴한 자연은, 역시 인간의 간섭과 발길이 끊겨야만 복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울산의 무제치늪이 발견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유일의 고층습원이었던 대암산 용늪은 그 희소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람사협약에 의한 보호습지로 등록되었으며, 2년 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해발 1280m 대암산 정상부에 형성된 용늪은 원래 큰용늪과 작은용늪이 있었는데,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생명력이 약했던 작은용늪이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소멸되어버리고 말았다. 4500살은 넉히 먹었을 거고, 전쟁까지 너끈히 이겨낸 늪 하나가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사라지기까지는 채 20년도 걸리지 않았다.

양구 팔랑리의 쌍겨리 ⓒ유성문(2004)

남은 큰용늪마저도 늪 한가운데가 찢어지고 둑이 가설되는 치명상을 입었다. 대암산 고지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에서 스케이트장을 조성하려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다행히 지금은 용늪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재활의 길을 걷고 있고, 군에서도 환경보직을 두어 늪의 보호에 앞장서고 있지만, 또 언제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알 수 없는 위태로움 속에 늪은 한껏 숨을 죽이고 있다.

용늪뿐만 아니라 대암산·대우산 일대에는 개느삼 같은 자생식물에서부터 산양 등 희귀동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최근에는 토종 여우의 사체가 발견되어 완전히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여우가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우려스러운 것은 남북 평화분위기가 조성되고 군의 통제가 느슨해지면 보호 동·식물에 대한 인간이 간섭과 훼손이 부쩍 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사람들이 평화를 찾으면서 도리어 생태계의 평화가 깨지는 모순을 더 이상 되풀이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해안분지 ⓒ유성문(2004)

지금은 오를 수 없는, 올라서는 안 될 대암산을 비껴 돌산령을 넘어가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담아내던 거대한 ‘화채그릇(Punch Bowl)’이 나온다. 해안분지는 6·25전쟁 때 총알이 바닥나자 맨주먹으로 치고받는 육탄전을 벌였던 곳이다. 분지의 모양이 마치 커다란 대접처럼 생겼다 해서 미군과 종군기자들 사이에 ‘펀치볼’이라 부르던 것이 한동안 공식 명칭처럼 되어버렸다.

마을 전체가 분지 안에 들어앉은 해안마을은 원래 뱀이 들끓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 지나가던 스님의 조언에 따라 뱀의 천적인 돼지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편안해졌고, 마을 이름 또한 ‘해안(亥安)’이 되었다. 하지만 한바탕 ‘피의 전투’를 치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곳곳에 묻혀있던 대인지뢰에 의한 사고피해 등 숱한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다. 돼지는 어디로 갔는가.

양구전쟁기념관 ⓒ유성문(2004)

나는 파로호와 대암산 일대를 떠돌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쓰려 했던 것일까. 해안분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멀리 그리운 금강산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오는 을지전망대에 오르려면 양구전쟁기념관에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전쟁기념관 한켠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던 내 시야로 조형물 위에 올라앉은 참새 한 마리의 가벼운 몸짓이 들어왔다. 그토록 가벼운 전쟁, 그토록 가벼운 평화. 그 작은 몸짓 하나 때문에 자칫 한없이 무거워질 뻔했던 내 기분도 제법 유쾌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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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군 방산면 민통선 북방에 위치한 두타연은 유수량은 많지 않으나 주위의 산세가 수려한 경관을 이루며, 오염되지 않아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의 국내 최대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높이 10미터, 폭 60여 미터의 두타폭포는 굉음이 천지를 진동하고 한낮에도 안개가 자욱하여 시계를 흐리게 할 정도다. 이른 봄이면 거센 물줄기를 타고 오르는 열목어의 행렬로 장관을 이룬다.

두타연 ⓒ유성문(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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