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주장자 이야기

혜범 작가/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1.10.05 09:00 의견 0

<노승헐각>. 조영석 그림. 비단에 담채, 26.8×17.2㎝,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을 보면 노스님이 나무 둥치에 기대 지팡이를 짚고 다리쉼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노승헐각(老僧歇脚)>이다.

눈꼬리는 처졌지만 눈빛은 또렷한 삼각형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의 스님은 수염이 무척 성글다. 스님이 고집도 있어 보이고 시니컬하시고 위트도 있으실 거 같다. 입이 합죽해 보이는 것은 이가 좀 빠졌기 때문인 듯하다. 길쭉한 모자 안으로는 동그란 민머리가 나지막하다. 목에는 굵은 염주를 둘렀고 짚신이나 미투리 초혜(草鞋)를 신었다. 메었던 바랑을 풀 섶에 툭 던지고 소나무 뿌리에 걸터앉으며 아고고, 하셨을 것처럼 그림이 생생하다.

절간 노스님들에게 지팡이는 오브제이며 상징이다. ‘헐각(歇脚)’이란 행각 중의 잠시 다리쉼이다. 지팡이는 걸을 때나 서 있을 때 몸을 의지하기 위해 짚는 막대기를 일컫는다. 스님네들이 지팡이 끝에 방울을 매달거나 쇠붙이를 붙여 소리 나게 하는 것은 산중의 벌레나 뱀, 짐승들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터이니 비켜가라, 밟히거나 놀랄 수 있다는 경계의 뜻이다.

‘지팡이 날리다’는 지팡이를 검으로 쓰는 게 아니라 깨달음을 향한 행각이란 의미이다. 옛날 스님네들은 거의가 지팡이를 드셨다. ‘왜 지팡이를 드는가?’라는 질문은 당신을 때리기 위해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산엘 올라갔다 내려와 내 방 앞에 내가 지팡이 하나 세워둔 걸 보고 한참 상념에 잠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탁발을 다니던 스님이 지팡이에 매달린 요령을 흔들며 반야심경을 염송하는 걸 보았다.

‘할(喝)’과 ‘방(棒)’은 고함과 몽둥이를 뜻한다. ‘할’은 선승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으로서 배우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소리를 말한다. 말이나 글로서는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에 한계가 있다 하여 마음과 뜻으로 알려 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지팡이는 ‘방’이 되기도 했다. 옛날 노사는 지팡이로 나를 쿡쿡 찌르는 시늉을 하셨다. 소리 소리를 지르실 뿐, 지팡이를 칼처럼 나를 베거나 자르거나 찌르신 적은 없었다. ‘방’은 몽둥이를 말한다. 가지고 있는 죽비도 주장자, 이 방에 해당된다. ‘할’이 고함소리를 뜻하듯이 ‘방’이라는 말은 회초리를 일컫는 것이다. 죽비를 맞아본 이는 안다. 실제로 아프지 않다. 소리만 클 뿐이지. 그러나 몸은 아프지 않지만 마음은 아프다.

지팡이는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지팡이는 지수화풍으로 뭉쳐진 한 개의 승화된 바로 그 마음이라는, 한 주장자라는 지팡이이다. 이제 지팡이의 시대는 끝이 난 것인가? 걸을 때나 서 있을 때 몸을 의지하기 위하여 짚기도 하지만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이 될 수도 있고 달을 가리키는 지시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은 지팡이 대신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걸 많이 본다. 그래도 우리 마을 어르신들을 보면 지팡이 하나쯤은 소지하고 계신다. 아무 나무나 다 지팡이가 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지팡이 하나가 손오공의 ‘커져라’ 여의봉이 될 수 있고, 마법사의 요술지팡이도 부처님의 지팡이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늘고 긴 막대기 하나. 사람의 제3의 다리가 되기도 하여 노약자나 장애인 등 걷기 힘든 사람들이 자주 이용한다. 사람의 다리 길이 정도로 나무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요즘은 작대기 대신 상아와 금속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렇듯 지팡이에는 어마어마한 상징이 들어 있다. 시각 장애인에게 흰 지팡이는 안테나요, 삶의 더듬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지팡이 하나가 있는가? 지팡이를 보면 허리 굽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스승 생각이 난다. 그리고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되돌아보게 된다.

선사들이 만행을 떠날 때, 법상에서 성성한 할을 토할 때, 방일한 제자를 방으로 내려칠 때 꼭 필요한 것이 주장자다. 수행자의 법구 18가지 중에 대표적인 물목으로 석장, 법장, 지장, 육환장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차를 타게 되면서 요즘처럼 주장자를 쓸 일이 없어진 시대에도 선사들에게는 여전히 법의 상징과도 같은 법구다.

나는 아직 지팡이를 짚고 다닐 나이는 아니다. 그래도, 마음의 지팡이 하나 들고 다닐 필요는 있는 거 같다.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