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등 돌릴 수 없어서 세상은 고단하단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길은 땅 위를 떠돌고
떠돌다 돌아가는 길에 문득,
여태껏 사주지 못했던 통닭 한 마리 값을 셈하며
빈 주머니 뒤적거릴 때
돌아갈 곳 있어도 세상은 너무나 아득하구나.
그러나 어쩌겠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고,
허기의 깊이로 퍼 올릴수록
삶은 그렇게 비어만 가는 것을.
-졸시 <오이도>
오이도가 원래부터 섬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제가 염전을 만들려고 제방을 쌓으면서 섬이 되었다고도 하고 뭍이 되었다고도 하며, 그때부터 까마귀 좋아하는 일본사람들이 까마귀 귀를 닮았다 하여 ‘오이도(烏耳島)’라 불렀다 한다. 까마귀 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도 없지만, 사실 원래 지명인 ‘오질애(吾叱哀)’는 너무 슬프기도 하다.
안말을 중심으로 살막, 신포동, 고주리, 배다리, 소래벌, 칠호, 뒷살막 등 자연부락이 있었으나 1988년부터 시작된 시화지구 개발사업으로 모두 폐동되고, 섬 서쪽 해안을 매립, 이주단지가 조성되었다. 지금은 ‘죽었다 살아난’ 시화호의 들머리쯤으로 여겨지는 오이도는 소주 한잔에 취해 졸다가 하차역을 놓쳐버린 지하철 4호선(당고개-오이도) 퇴근객들에게는 여전히 가장 멀고 아득한 섬이기도 하다.
어느 해 추석연휴였던가. 느긋하게 영흥도를 찾은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웬일로 섬으로 들어가는 길목부터 막히는가 싶더니 호젓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해야 마땅할 바닷가에 사람들이 득시글대는 것이었다. 한눈에 봐도 우리와는 다른 것이 분명한 이방인들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영흥도에서 연륙교를 타고 선재도, 대부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시화방조제 건너 안산이고, 그곳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세상 ‘국경 없는 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연휴는 얻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은 비록 회색의 바다지만 거리가 가까운 그 섬들에서 시름을 달랬던 것이리라.
안산역 앞 원곡동 ‘국경 없는 마을’은 그 속내만 제하면 이 땅에서 가장 ‘글로벌’한 곳이다. <국경 없는 마을>을 기록한 박채란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꼬마 티안과,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누리끼와 그의 친구 초리, 몽골 태생의 늦깎이 고등학생 따와와, 영화감독을 꿈꾸는 방글라데시인 재키와, 조선족 김복자 아주머니와, 그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재호 아저씨와, 코시안을 가르치며 ‘그래도 너희들이 희망’이라고 말하는 김주연 선생과, 중국, 필리핀, 태국, 베트남, 파키스탄 등등 올림픽은 몰라도 아시안게임은 너끈히 치를 만한 사람들이 한데 섞여 산다.
그들은 ‘태어난 곳은 있지만 고향이 없는 사람들(김재영 <코끼리>)’이고, 고장 난 프레스에 한쪽 팔을 잃은 사람들이며, 위장결혼을 했거나 이혼당한 사람들에다, ‘아메리칸 드림’을 외치던 사람들 밑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그 ‘아고라파스(이산자)’들을 완강하게 묶어주는 것은 오로지 ‘꿈’이다. 그 꿈 밑에서 고통이나 가난조차도 평등하다.
무참하게도 길의 끝은 궁평리다. 1999년 화성 서신의 청소년수련원 ‘씨랜드’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궁평리 바닷가로 놀러왔던 유치원생 19명을 포함, 24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때 사고로 아들을 잃은 전 국가대표 여자하키선수 김순덕 씨는 국가에서 받았던 훈장과 표창을 반납하고 이 땅을 떠났다. 깡통 같은 컨테이너 박스를 2층, 3층으로 쌓고 그 안에 544명의 생명을 때려넣고 재웠던 나라, 근본 원인은 제쳐놓고 모기향이니 누전이니 화재 원인을 둘러대기에 바빴던 나라, 모두들 그 끔찍한 기억마저 지워버렸지만 그때 ‘꿈’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놀랍게도 그나마 씨랜드사건을 노래한 것은 젊은 래퍼들이었다.
피우지도 못한/ 아이들의 불꽃을/ 꺼버리게/ 누가 허락했는가/ 언제까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반복하고 살 텐가 –H.O.T <아이야> 중에서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이 땅으로 몰려오는 사람들과, 도무지 살 수 없다고 이 땅을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차라리 늘 길에서 떠돌 수밖에 없는 내 운명에 안도했다.
_그 마을의 속내
모든 떠도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서럽다
나는 북관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 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다. -백석 <고향> 전문
불우하게도 이 시대 고향은 사람들 마음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고향 밖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고향이 사람 마음 밖을 떠돈다. 기껏 찾아간 고향이래야 길바닥에 나앉아 있거나 포클레인으로 무참히 파헤쳐져 있기 일쑤다. 어떤 요령 좋은 이는 고향에서 출마를 꿈꾸거나 넘치는 돈으로 마름의 땅을 사들이기도 하지만, 그때 고향은 천박함으로 구슬프다. 나는 어차피 고향을 찾을 생각도 없고 찾아봐야 부끄럽기만 할 따름이므로, 어쩌다 고향이 생각날 때면 차라리 안산 원곡동 ‘국경 없는 마을’로 간다. 거기 고향을 버리고 온 사람들 사이, 버려진 고향이 있다.
원곡동의 한 다방(소위 ‘티켓’이라 불리는)에서 만난 두 여성은 멀리 하얼빈이나 베이징에서 온 조선족이다. 그들의 고향은 엄연히 중국이지만 이미 버리고 왔으므로, 아니 버림받고 왔으므로 이제 고향은 이곳 원곡동이거나, 아니면 없다. 하얼빈에서 온 김 향(그들은 이곳에서는 ‘양’이란 말 대신 향기로울 ‘향’자를 써서 부른다며,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은 사십대 중반이고, 베이징에서 온 조 향은 삼십대 초반이다.
김 향은 원래 중국 오상현 소산자 출신으로, 그곳 조선족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경도 어디 출신이라고 하는데, 관심이 없어 물어보지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갓 스물에 조선족 남자를 만나 결혼해 그해 딸 하나를 낳았다. 남편은 인물 좋고 체격 좋고 수완 좋은 멀쩡한 위인으로, 결혼 후 하얼빈으로 나와 장사를 해서 돈도 좀 벌었다. 그러나 씀씀이가 헤퍼 돈을 모으지는 못한 모양이다. 게다가 밖에 나가면 그렇게 사람 좋은 위인이 집에만 들어오면 폭력적으로 바뀌었다.
거의 매일 매질을 당하면서 숱하게 헤어질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커가는 아이를 보면서, 또 막상 헤어져도 별 뾰족한 수가 없어 참고 살아왔다. 부산 어디쯤에 시숙이 되는 사람이 살고 있어 그의 초청으로 3년 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다. 남편은 공사판을 떠돌며 막일을 했고, 그녀 역시 공장이나 식당 등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잡일을 했다. 하지만 원래 몸도 약한 데다 그동안의 고생으로 골병이 들다시피 해 그마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당연히 원곡동으로 왔다.
그녀는 3년간의 체류기간이 다 되어서 이제 몇 달 후면 중국으로 일시적이나마 돌아가야 한다. 이제 겨우 한국생활에 익숙해질 만한 그녀로서는 솔직히 고향에 돌아가기가 싫다. 한국에 와서 돈 한 푼 모은 게 없으니 고향에 돌아가서 내놓을 면목도 없다. 들어가더라도 곧 다시 나올 생각이지만, 이제 고향에 가면 맏딸로서 늙으신 부모를 다시 뿌리치고 나오기도 쉽지 않을 것 같고, 어떻게 살고 있을지 모를 딸네미도 눈에 밟힌다.
조 향의 경우는 더욱 어렵다. 부산 출신인 아버지와 북한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딸로 곱게 자라왔고, 대학까지 나와 북경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하다 조선족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끝내 이혼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홀로 어렵게 살던 아버지가 말기암으로 쓰러지자, 치료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아버지를 모시고 한국에 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가능성은 희박했고, 치료비도 감당키 어려워 아버지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고, 그녀는 한국에 남아서 아버지의 치료비를 벌기로 작정했다. 그녀 역시 당연히 원곡동으로 왔다.
그리고 또 당연히,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아버지께 치료비 한 푼 보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죽기 전에 다시 국적을 회복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어떻게든 한국에 눌러 살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중국에 있는 아버지와 통화를 해보지만 가뜩이나 말하기 힘든 아버지는 눈물을 삼키느라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토록 막내딸을 예뻐하던 아버지에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눈물밖에 없다. 혈혈단신 ‘낯선 조국’에 남은 그녀는 한국말조차 서툴러 누구 하나 붙잡고 사정할 사람조차 없으니 매일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다. 울고 또 운다. 그렇게라도 해야 겨우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에.
그녀들은 한결같이 계속 한국에서 살고 싶어 했다. 비록 중국에서 하루 8시간 일로 끝인 데 반해 한국에서는 13시간이 넘도록 뼈 빠지게 일해야 하지만, 그래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가녀린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꿈에서 깨기까지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 헛된 꿈들 밖으로도 고향은 떠돈다.
그들은 어찌저찌 해도 한국이 좋다고 했다. 시끄러운 중국말보다 한국말이 좋다고 했고, 부드러운 한국남자가 좋다고 했고, 한국노래가 좋다고 했다. 더구나 아무 힘없는 여자의 몸으로 그래도 돈을 벌 수 있는 한국이 좋다고 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돈을 좀 벌면 떳떳이 장사라도 낼 것이라고도 했다. 그들은 ‘이 땅’이 아니라 ‘저 먼 한국’에 살고 있었다.
모든 떠도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서럽다. 고향 역시 사람의 마음 밖을 떠도니 서럽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은 유선이 아니라 무선으로도 얼마든지 천리만리 밖으로 달려갈 수 있게 되었지만 고향은, 사람은 서로 밖으로만 떠도니 상대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신이 부대끼고 있는 삶들이, 살아내 갈 수밖에 없는 세상이 그대의 고향이고, 그 삶을 끝내고 돌아가야 할 그 어느 곳이 바로 당신의 고향이다.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든 사이 꿈속에서 누군가 내 맥을 짚는데, 그 손길이 하도 따스하고 부드러워 그 속에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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