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상도 안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한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통영에서 나서 자라고 진주에서 공부했던 나는 <토지>의 주인공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써 경상도 이외 다른 지방의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석꾼’이 나옴직 할 만한 땅은 전라도에나 있었고, 경상도에서는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평사리는 경상도의 어느 곳보다 넓은 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도 든든한 배경이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박경리 선생은 평사리를 <토지>의 무대로 설정한 이유를 그렇게 밝혔다. 그러나 정작 작가 자신은 <토지>를 집필하기 전은 물론이고, 집필을 끝내기까지 평사리를 단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다. 다만 작품을 구상하던 때 평사리가 있는 악양뜰을 잠깐 스쳐 지나쳤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손바닥 읽듯 평사리를 그려낸 작가의 혜안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작가는 집필을 끝내고 비로소 평사리를 찾았을 때 이렇게 벅찬 소회를 토로했다.
“실로 8년만의 외출이었습니다. 지리산에 대한 것. 또 내 겨레, 내 동족 나아가 인간, 또 산천에 대한 내 애정, 내 눈물로 내가 썼다는 것을 자각했고, 여러분의 가슴에 전달되었다는 게 감동으로 북받쳤습니다. 한마디로 생명에 대한 슬픔, 우리 민족에 대한 슬픔, 눈물, 사랑으로 <토지>를 썼다는 사실을 비로소 이 자리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리산이 안고 있는 우리들, 또 나아가 인류, 더 나아가 생명, 슬픔, 사랑, 그런 것이 <토지>를 쓰게 하는 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만약 작가가 경상도가 아닌 전라도 지방의 토속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면 <토지>의 무대는 운조루가 있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였을지도 모른다. 구례구에서 하동포구로 흘러가는 섬진강을 따라 난 길을 달리다 보면 오미리의 너른 들을 만난다. 이른바 ‘구만들’이다. 오미리 일대는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명당으로 알려져 왔고, 혹자는 이곳을 청학동으로 여기기도 했다. 운조루는 오미리 명당에 자리 잡은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으로, 가히 최참판댁을 대체할 만하다. 더구나 이 집은 대청마루에 누구나 열어 퍼갈 수 있다는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쌀뒤주를 두어 어려운 이웃들을 보살폈다.
1776년 이 집은 지은 유이주는 조선시대 무관으로, 어려서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나자 들고 있던 채찍을 내리쳐 쫓아버렸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힘이 세고 기개가 뛰어났던 인물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런 상징인 듯 문설주에는 지금도 호랑이 턱뼈가 걸려 있기도 하다. 또한 사랑채 누마루 밑에는 옛 주인이 사용하였던 거대한 수레바퀴가 놓여있어 어떤 끊임없는 연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종자뜰’이라 불리는 운조루 앞뜰에 서면 마치 소설 속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것은 영락없는 <토지>이고, <토지>보다 더한 <토지>이기도 하다.
1897년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그려보려면 이미 늦었거나 아직 이르다. 지리산의 다락논들은 고즈넉하고 논배미에는 쓸쓸함마저 묻어난다. 그러나 가만히 귀기울여보라.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고로쇠나무는 꿀럭꿀럭 자꾸만 물을 토해내고, 그 물들 흘러 섬진강 재첩들을 흔들어 깨운다. 그 물들은 다시 산을 거슬러 곳곳에 꽃들을 피워낸다. 청매실농원의 매화를 필두로, 산수유가 피고, 벚꽃이 피고, 이윽고 지리산은 온통 꽃대궐이 되리라. 이미 봄, 한껏 물오르기 시작했으니.
굳이 평사리의 토지재현단지까지 오를 필요조차 없으리라. 악양뜰에 서면 너른 들판에 소나무 두 그루 소슬하니, 눈앞으로 파노라마가 연신 스쳐 지나간다. 작가는 <토지> 연재 도중 한 독자가 최참판댁의 모델이었을 법한 평사리의 조부잣집 사진을 찍어다 보여주자 오히려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자기가 그렸던 것과 너무도 흡사한 그 모습에. 작가만한 상상력이 없다 하더라도, 사람 체취 하나 느낄 수 없고 지은이의 정성조차 보이지 않는 전시공간보다는 그저 고샅길이라도 거닐며 이곳은 최참판댁, 이곳이 김훈장네, 이곳은 평산이 살던 집… 하며 마음속으로나마 그려볼 일이다.
“나는 다만 도구일 뿐 내가 쓴 것 같지 않다. 지리산은 무엇이고 악양은 또 무엇인가. (…) 악양은 이상향이다. 한마디로 생명에 대한 슬픔, 우리 민족에 대한 슬픔, 눈물, 사랑으로 <토지>를 썼다.”
_PS
평사리가 있는 하동군 악양면은 2009년 2월 우리나라 다섯 번째의 슬로시티로 인증을 받았다. 이는 세계 최초의 차나무 시배지 슬로시티 지정이기도 하다. 형제봉, 신선봉, 시루봉, 구재봉 등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인 채 한가운데로 섬진강의 지류인 악양천이 흐르는 악양의 풍광은 가슴 저리게 아련하다. 특히 가을녘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악양뜰의 넘실거림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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