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안내】빨간 피터의 고백 :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그래픽노블로 보는 감동

조용석 기자 승인 2022.03.25 15:09 의견 0

빨간 피터는 하겐베크 동물원 사냥꾼에게 잡힌 후 놀랍게도 5년 만에 인간으로 진화했다. 그는 그 이유를 인간들이 멋대로 해석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저 ‘출구’, 철창으로 된 우리 속에서의 ‘출구’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역설한다. 그는 인간 세계에 합류하기 위해 수없는 모욕을 감수해야만 했으며, 인간들이 무심코 던지는 돌멩이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며 자신이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다. 등을 굽실거리고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다 따라 하면서 더욱 정교하게 모방했다. 심지어 가장 저열한 인간의 결함과 타락상까지도 흉내 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원숭이성, 즉 야생의 본능을 어떻게 내던질 수 있었는지 학술원 회원들에게 진술하기도 했다. … 돈도 벌 만큼 벌었다는데, 그는 정말 인간이 된 것일까?


알려진 바대로 「빨간 피터의 고백」은 연극배우 추송웅 씨가 삼일로창고극장 무대에 연극으로 올리면서 유명해졌다. 이후 이 작품은 많은 연출가와 배우들의 손을 거쳐 각기 다른 버전으로 무대에 오르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으며, 카프카 단편집에 포함되어 여러 버전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카프카 독자라면 많은 이들이 느끼는 바지만 ‘작품의 난해성’이 독서를 방해했다. 심지어 이 짧은 단편조차도 완독하지 못하는 독자도 왕왕 있었다. 그렇게 카프카의 작품집은 독자의 손에 오래 붙잡히지 못하고 책꽂이로 직행하기 일쑤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작품이나 카프카의 명성과는 별개로 연극을 보거나 해설 읽는 것으로 독서를 대신하는 이들도 많다.

이 그래픽노블 『빨간 피터의 고백』은 독자들의 이런 어려움을 단숨에 해결해준다. 그림과 말풍선을 번갈아 가며 읽고, 또 ‘빨간 피터’와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제스처를 살펴보다 책장을 덮고 나면 정말로 무대에서 상연되는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감상한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이 된 피터는 암컷 침팬지와 성적 유희도 즐기지만…
일단 고매한 학술원 회원들 앞에 선 빨간 피터는 담배 먼저 꼬나물고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피터가 인간의 권위를 무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기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피터는 재킷까지 벗어 던지고는 자기가 원숭이성, 즉 야생성에서 벗어나 어떻게 인간으로 진화했는지를 역설한다.

인기를 얻고 돈도 벌게 된 피터는 유럽의 일반 교양인 수준에 올라섰다. 그러나 인간으로 진화했다고 본성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 반쯤 인간화된 암컷 침팬지와 다소간 살가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피터는 암컷 침팬지의 길들여진 짐승의 망연한 눈길을 애써 외면한다. 마치 찰턴 헤스턴이 분한 영화 「혹성탈출」의 장면들과 대비되어 묘한 페이소스를 느끼게도 하는데, 빨간 피터는 다음처럼 고백한다.
“낮 동안에는 그녀와 대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 망연한 표정, 길들여진 짐승의 눈길에 어쩔 수 없이 고여 있는 슬픔 때문이죠.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리니 외로움이 몰려왔어요. 견딜 수가 없더군요.”(본문 155쪽)

저자 마히 그랑이 독자들에게 던진 생각거리
저자는 5장으로 나누어진 속표지에 다음과 같은 경구를 달았는데, 이는 이 책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괴물이다.” - 무명씨

“우리는 처음부터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간이 되어갈 뿐….” - 에라스뮈스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느 쪽에게? 동물에게 아니면 인간에게?” - 조셉 보이든

“인간성이란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어떤 시도이다.” - 장 지로두

“사람들이 당신을 괴물 취급할 때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 - 데이비드 호멜

저자 :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원작)
체코 태생의 유대인 소설가. 「변신(Die Verwandlung)」, 「심판(Der Prozess)」, 「시골 의사(Ein Landarzt)」 등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책의 원작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Ein Bericht f?r eine Akademie)」는 1917년 월간 유대인에 처음 발표된 단편소설로 우리나라에서는 1977년 연극배우 추송웅 씨가 「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제목의 모노드라마를 삼일로창고극장 무대에 처음 올리면서 유명해졌다. 이 연극은 지금도 꾸준히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역자 : 서준환
2001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한 후 소설가와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소설집 『너는 달의 기억』, 『고독 역시 착각일 것이다』,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 『다음 세기 그루브』, 장편소설 『골드베르크 변주곡』, 『로베스피에르의 죽음』, 연작 극 텍스트 『죽음과 변용』 등을 펴냈다. 옮긴 책으로는 『알렉스』, 『갑자기 혼자되다』, 『주말 소설가』, 『상수리나무와 함께한 시간』 등이 있다.

그림 : 마히 그랑 Mahi Grand
1996년 장식예술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 무대미술가로 연극 분야에서 활동했다. 로랑 로제로, 줄리아 비디, 티에리 티유 니앙, 올리비아 그랑빌 등의 연극에서 무대미술을 맡았다. 이후에는 영화계로도 진출하여 브뤼노 뒤몽, 노에미 르보스키, 로슈디 젬, 크자비에 지아놀리 등의 감독과 작업했고, 그와 동시에 조각이나 회화 등의 조형 예술가로서의 작업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https://www.mahigrand.net). 한편으로 그는 책의 삽화도 그리고 있다. 피에르 데스프로주의 『코르비니우 교수의 좋은 충고』(세이유출판사, 1998)로 출간의 기쁨을 맛본 이후 『에메의 유작』(에퍼즈출판사, 2005), 『미국만큼이나 아름다운 알제리』(슈타인키스출판사, 2015), 『내 나무 위의 영국인』(드노엘그래픽출판사) 등을 올리비아 버튼과 함께 작업했다. 2022년 1월 자신의 첫 번째 그래픽노블인 『빨간 피터의 고백 :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가 다르고출판사에서 나왔다.

■ 늘봄출판사 펴냄 / 값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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