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선생님. 고교시절 은사인 선생님께서는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셨습니다. 저희 학교로 부임하기 전, 선생님께서는 덕산에서 첫 교편을 잡으셨고, 그때의 기억들은 <덕산에서>라는 시편에 녹아 있었지요. 진흙에 떨어트려 발뒤꿈치로 비벼 돌리면 다시 광채를 되찾는 동전 이야기를 노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부터 덕산은 제 마음속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또 덕산으로 갑니다. 비록 세월은 무심히 흘렀고, 동전은 다시 빛을 잃었지만….
서산마애삼존불과 보원사터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다 운산나들목에서 빠지면 한반도의 오장육부 내포 땅이다. 비산비야의 내포는 봄조차 느긋하기만 하다. 고풍저수지 뚝방길로 민들레는 노랗게 피어오르고, 느린 물결 위로 바람은 또 어디론가 길 떠날 채비를 한다. 그 호젓한 저수지 길의 끄트머리쯤 돌무지 위에 홀연히 미륵이 서 있다. 마치 이곳이 바로 마애삼존불이 사시는 강댕이골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처럼. 그리 길지 않은 산비탈을 타고 벼랑 끝에 오르면 너럭바위에 돋을새김한 세 분의 부처님이 계신다.
신라에 석굴암대불이 있다면, 백제엔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석굴암대불이 엄숙함과 완벽성으로 대하는 이의 마음을 어렵게만 한다면, 서산마애삼존불은 흉금 없는 이웃처럼 친숙하고 소박한 표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더없이 편안하게 해준다. 석굴암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강댕이골 부처님들 또한 한때나마 전각 안에 갇혀 지내야 했다.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취지야 모를 바 아니지만, 한편으로 보호라는 명분 아래 격리되고 유폐된 모든 문화재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지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곤 했더랬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 불면 바람에 스치우며 자연 그대로 있다가 서서히 소멸해버리는 것 또한 이치와 섭리에 맞는 일이지 않을까 하고.
자연 햇살을 가로막고 있던 전각이 2006년 철거되기 전까지 강댕이골 부처님들의 그 본디 해맑은 ‘백제의 미소’를 되살리기 위해 장대 끝에 갓등을 달아 여기저기 비춰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분들이 계셨다. 오랫동안 자원관리인 노릇을 해온 성원 할아버지가 연로로 물러앉으신 이후, 잠시 이곳에 머물며 그 일을 잇고 있던 젊은 명정 스님은 몰려온 답사객들에게 마애삼존불에 대한 설명을 끝내며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은 석공의 솜씨를 보러 오신 게 아닙니다. 저 미소 속에 담긴 부처의 마음을 담아가셔야 합니다.”
마애삼존불을 내려와 골짜기 안으로 좀 더 들어가면 널따란 분지 위에 자리 잡은 보원사터가 나온다. 폐사지가 이렇게 아늑할 수도 있다니. 조붓한 시냇물을 건너 소풍길처럼 다정한 오솔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오층석탑과 탑비 몇 기만을 남긴 채 텅 비어버린 절터에 제법 무르익은 봄이 모른 척 들어앉아 있다. 절터에 잇대어 있는 폐농가에서 뒤돌아보면, 개울 건너 산자락에 산벚꽃이 한창이다. 잠시 몽롱해진 시야로 이번에는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젊은 연인 한 쌍이 걸어 들어온다. 젊음은 폐사지에서도 아름답다. 덧없는 봄빛보다도 아름답다. 부럽디 부러운 나의 마음은 문득, 흘러간 청춘을 그리워했다.
수덕사, 추억은 사라지고
내포들 한가운데 어렵사리 솟은 가야산 자락 밑으로 ‘지구유(地球乳)’ 덕산온천이 있다. 제법 많은 시설들이 들어서고 개발의 바람은 계속되고 있지만, 덕산온천 일대는 그렇게 번잡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들판과 산자락에 드문드문 온천장들이 들어선 탓인데, 비철이면 오히려 쓸쓸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나는 세상살이에 지쳤을 때 어김없이 덕산온천에서 하루 이틀 묵어가곤 했다. 상처 입은 학을 치유해줬다는 온천물에 심신을 달래고, 석문봉으로 수덕사로 그렇게 소일하다 보면 찌들은 살갗을 뚫고 활기는 소리 없이 움트곤 했었다.
그렇지만 수덕사는 갈 때마다 조금씩 나를 실망시키기도 했다. 처음 수덕사를 찾았을 때 오래된 여관과 밥집 한두 군데만 낀 솔밭길은 얼마나 그윽했던가. 산등성이에 올라탄 정혜사의 처마를 바라보며 절마당에 올라서면, 발밑으로 펼쳐지는 내포들은 또 얼마나 아늑했던가.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난장에 가깝게 들어선 사하촌(寺下村)으로도 모자라 절 입구는 항시 포클레인의 소음으로 가득한 곳이 되어버렸다. 3대 비구니 사찰의 하나인 이 유명한 절은 몇 십 억짜리 건물을 짓고 허물기를 부처님 손바닥 뒤집듯이 했었다. 그러는 사이 덕숭산을 감싸던 경허와 만공의 법력은 희미해져가는 듯했고.
수덕사와 한몸이나 다름없던 수덕여관의 잔재 또한 무참하다.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늘 밑에서 인고와 기다림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수덕여관의 안주인 박귀희 할머니가 세상을 뜬 후, 뜨락에 복숭아와 나리꽃 가득하던 초가 여관은 폐가가 되었다. 어떻게든 보존해보겠다고 개보수를 해댔지만, 할머니 없는 수덕여관이 다 무슨 소용일 것인가. 사람의 온기 없이 박제되어 휑덩그레한 여관 앞마당에 고암의 이끼 낀 암각화만 어둑하게 놓여 있었다. 생전의 고암은 “이 암각화 안에 삼라만상의 영고성쇠가 다 들어있다”고 했다는데.
해미읍성 지나 개심사로
수덕사를 돌아 다시 운산 쪽으로 길을 잡으면 이름도 아름다운 해미(海美)읍이 나온다. 비록 옛날 읍이라고는 하지만 작은 시골마을에 불과하니, 지금은 비어버린 해미읍성이 그나마 마을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진다. 조선시대의 읍성 중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해미읍성은 한때 이순신 장군이 군관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여름이면 담쟁이덩굴 울울한 진남루를 들어서면 탁 트여진 초원이 펼쳐져 눈맛을 시원스럽게 한다.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복원된 관아로 가다보면 홀연 키가 훌쩍한 범상치 않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600년 묵은 회화나무로, 이곳에서는 ‘호야나무’라고 부르고 있는 이 나무는 순교의 시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현장이다. 병인양요에 이어진 천주교 박해 때 숱한 신도들이 이 나무에 매달려 죽어갔다. 김대건 신부도 이곳에서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호야나무 그늘 아래서 순교하지 못한 나는 잠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씻는다. 그대 애달픈 믿음의 넋들이여. 바닷길 끊어진 해미의 하늘 위로 그저 종달새처럼 솟구쳐 오르기를.
길은 이제 이국적인 목장길을 따라 개심사로 이어진다. 삼화목장. 개발의 시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었던 전 국무총리는 난데없는 목장 개발계획을 들고 나와 조선시대 12진산(鎭山)의 하나였던 상왕산의 울창하던 숲을 베어내고, 638만평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목장을 만들어 버렸다. 그 ‘꿈의 목장’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정축재 재산의 환수라는 절차를 거쳐 지금의 농협 한우개량사업소가 되었다. 그 연유야 어떻든 4월 중순 무렵이면 어김없이 하얀 꽃을 피워 올리던 목장길의 벚꽃터널은 여전하지만, 구제역이 나라를 휩쓴 이후부터 쉽사리 문을 열지 않으니 그저 곁눈질로 탐미하며 지날 수밖에.
이나저나 세심동에 이르면 마음을 씻어야 한다. 솔향 그윽한 산길을 따라올라 외나무다리 놓인 경지(鏡池)를 건너 개심사 안양루 옆 나즈막한 해탈문에 이르면, 이번에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러나 어쩌랴. 아무리 옷깃 여미어도 경내에 가득한 봄꽃들과 눈길 마주치면 마음은 그냥 스르르 풀어지고 마는 것을. 범종루와 심검당, 자연목의 곡선미를 살린 기둥들, 대웅보전 처마기와들 버티고 선 도자기 연봉들, 명부전 역사상(力士像)의 의기에 찬 고함조차 모두 꽃으로만 보이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은 나에게 어림없는 일이고, 이 봄 다 가기 전에는 피안의 문턱조차 밟기 애당초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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