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선(禪)을 선(禪)이라 하면 선(禪)이 아니다

혜범 작가/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2.09.06 00:50 | 최종 수정 2022.09.06 01:21 의견 0

인제 만해마을 한용운상 | 사진 유성문 주간

선(禪)은 선(禪)이라고 하면 곧 선(禪)이 아니다.

그러나 선(禪)이라고 하는 것을 여의고는 별로 선(禪)이 없는 것이다.

선(禪)이면서 곧 선(禪)이 아니요, 선(禪)이 아니면서 곧 선(禪)이 되는 것이 이른바 선(禪)이다.

달빛이냐... 갈꽃이냐, 흰 모래위에 갈매기냐.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이름을 이름하면 항상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선(禪)을 선(禪)이라 하면 머리 위에 머리를 둠이요, 선(禪)을 선(禪)이라 하지 않아도 뾰족함 위에 뾰족함을 두는 것이다.

나는 몇 번 죽었다 살아났다. 누가 나의 살활(殺活)을 종탈하는가. 그 무엇이 나의 생사를 가늠하는가. 그 무엇이 나의 우주를 만들었는가.

한번은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가위로 피 묻은 승복은 죄다 찢겨나가고 알몸인 채 수술실로 실려 간 적이 있었다. 허리뼈는 물론 양쪽 무릎뼈가 깨지고 갈비뼈가 폐를 찔렀다고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수술을 위해 전신마비 주사를 받고 드러누웠는데 그때 약간 내게 멘탈이 있었다.

뭐래?

스님.

난 이 스님이 진짠지 가짠지 아는데.

어떻게?

의료진들이었다. 내 팔뚝을 들여다보더니 연비자국을 찾았다. 두 개의 연비, 흉터자국을 보자 ‘그럼 뻘떡 일어나 수행하실 수 있게 합장해 드려야지’하는 말소리까지 듣고 나는 정신을 잃었던 적이 있다.

요즘 나는 띵까띵까 산다. 희로애락과 우비고뇌가 좋다. 연비자국이 있다고 진짤까? 창밖을 보니 또다시 비가 내린다. 푸르렇던 산, 흰 구름이 있던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왜 띵까띵까 사느냐고? ‘이쇠훼예 칭기고락(利衰毁譽 稱譏苦樂)’의 팔풍(八風), 그 세파에 충분히 허덕거리고 낑낑거리고 징징거리고 아둥바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둥거려봐야 흐리고 탁한 구정물인 걸 어쩌랴. 거룩하기만 했던 선시도 어록들도 모두 잠꼬대, 경험에 의하면 ‘천삼라 지만상(天森羅 地萬象)’, 흐리고 탁했던 물도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가라앉고 명경지수와 같이 맑고 향기로워지기 때문이다.

마음을 마음이라 하면 마음이 아니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매미소리가 진짜다. 천하의 모든 만물은 유(有)에서 생(生)하고 유(有)는 무(無)에서 생(生)한다. 무무(無)는 공(空)에서 생(生)하고.

나에게 구경(究竟)의 낙처(落處)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다. 나는 진짜의 삶을 살고 있는가, 거짓 나, 돈과 욕망, 권력에 끄달려 헤매이는 가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살았는가, 죽었는가. 정신을 잃고 헤매이던 시절을 되돌아보며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냉수 마시며 비가 와도 왁자지껄 울어대는 저 매미들 산개구리들 모양 누더기에 어리석은 중은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른 채 그냥 살아있는 게 좋다고 마냥 띵까띵까 산다.

칡꽃향기 지천이다. 그 누구에게도 누 안 끼치고 이렇게 조용히 띵까띵까 사는 게 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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