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업의 일상통신】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참사가 아니라 사고, 희생자 아니라 사망자로 부르는 정부

원동업 <성수동쓰다> 편집장 승인 2022.11.01 10:16 의견 0

아주아주 단순하게 세상을 나눈다면, 우리는 두 개의 세계에 산다. 아톰의 세계와 비트의 세계다. 기와 이의 세계, 구체와 개념의 세계. 불가에서는 아마도 이를 색(色)과 공(空)의 세계라고도 부를 것이다. 언어를 가까이 하는 내게 그것은 ‘세상’과 이를 부르는 ‘이름’ 정도가 될 것이다. 사실과 진실의 세계쯤.

할로윈은 10월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10월 31일이다. 서양에서는 이 날 세상에 쳐놓았던 ‘결계’가 풀리면서, 악귀와 유령과 귀신들과 괴물들이 인간의 땅으로 쳐들어 내려(혹은 올라)오는데, 그들에게 ‘희생당하지 않도록’ 그네들과 비슷한 분장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한 해 벌였던 행사들과 일들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제 닥쳐올 겨울 준비를 하는 시기에 ‘할로윈’은 서로 만나고, 즐거움과 긴장을 함께 나누는 행사일 수 있었다. 그 사고가 아니었다면.

이태원에서 할로윈 축제를 즐기려던 시민들에게 압사 사고가 있었다. 사망자들은 계속 늘어서 150여명 넘는 사람들이 희생자 명단에 기재되었다. 주인을 찾지 못한 신발들과 벗겨진 옷들과 핸드폰들과 열쇠들과 가방들이 즐비하게 유실물 분실물 센터에서 아마도, 어쩌면 오지 않을 주인들을 기다릴 것이다. 깊은 슬픔으로 유족들과 희생자들의 친구들과 지인들과 같이 하고 싶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일은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제 그 ‘사고’를 어떻게 명명하고, 어떻게 부를 것인지의 문제에 직면한다. 거기에 우리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것이 우리의 태도를 결정한다. 다음 할 일들이 거기 달려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의 죽음을 우리는 소천이라고 하거나 영면이라고 부른다. 검은 옷을 입고 찾아간 그 문상집에서 우리는 그네들의 죽음을 감히 거론하지 못한다. 그냥 ‘사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게 사람간 삶의 모습이다. 그게 역사가 쌓아온 우리 사회의 문화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 서울시청 앞에 꾸려진 합동분향소에는 ‘세월호 희생자’라고 쓰였었다. 2018년 합동 영결 추도식이 벌어질 때, 그 이름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합동 영결 추도식”이었다. 2022년 정부는 합동분향소를 꾸몄다. 이를 어떻게 썼을까?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다. 참사가 아니라 사고고, 희생자가 아니고 사망자란다.

왜 이 정부는 이런 지침을 내리고, 이 일을 이렇게 부를까? 2014년 8년 전에, 2018년 4년 전에 이미 ‘결론이 난’ 사회적 합의의 언어를 왜 굳이 버릴까? 언론들은 이를 참사라고 부르고 있지 않나. 우리들은 대화에서 이를 참사라고 하지 않나. 희생자들을 추모한다고 하지, 사망자들을 추모한다고 하지 않지 않나. 그런데 왜 굳이 이 정부는 그걸 ‘사고와 사망자’라고 부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말들이 남아있다. 그분께서 최후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였다. 십자가에 박혀 세워졌을 때, 하신 첫 말씀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였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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