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묵은 사랑부터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눈물을 감춘 춤부터 애잔한 복수를 꿈꾸는 것까지,
‘혁명’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모든 아픔이 꼭꼭 눌려,
오랜 세월 발효되고 있다."
소설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보면서 참 기구한 인생도 다 있다라는 생각을 한 사람은 많을 것이다. 운동권 학생으로 대학생활을, 한 신문사 노조위원장으로 지금은 모 일간지에 ‘이건행 칼럼’을 연재하고 인문학 책 비평가로 활동하는 이건행 작가가 시집 『상사화 지기 전에』를 펴냈다.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 영호가 "나, 다시 돌아갈래!!" 라고 외쳤듯 이건행 시인은 "잃어버린 나를 찾아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한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1997년 장편소설 『세상 끝에 선 여자』(임권택 감독에 의해 〈창〉으로 영화화)를 펴냈으며 경제일간지 등에서 사건·미술·증권 담당 기자로 일했고 인문학 책 비평가로 활동 중인 이건행 작가가 시집 『상사화 지기 전에』를 현대시세계 시인선 169번으로 출간했다.
이건행의 시집 『상사화 지기 전에』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이다. 시인은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삶의 시계를 자꾸 뒤로 돌린다. 마치 영화 〈박하사탕〉에서 달려오는 열차를 정면으로 마주한 중년 사내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친 후 가장 순수했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향해 시간을 뒤로 돌리는 듯하다.
후진하던 열차가 멈춘 역마다 특별한 사람들과 사연이 정차해 있다. 첫 번째 역에는 한 신문사 노조위원장을 하다가 백수가 된 나와 어머니(「전어구이」), 두 번째 역에는 꿈 많았던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할 때의 일화(「공장」), 세 번째 역에는 전방 철책선 지하 벙커에서 포르노를 처음 보고 토하던 군대 시절(「파밭 연가」), 네 번째 역에는 학내시위 사건으로 도주 중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선 첫사랑(「사랑의 무게」), 다섯 번째 역에는 박정희 개새끼라고 욕하는 아버지와 이를 말리던 어머니의 가족사(「솔밭에서」), 그리고 춤과 싸움으로 점철된 유년(「싸움」)의 ‘나 자신’이 존재한다.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은 세상의 끝에 서 있는 듯한 불운한 사내라면, 시집 『상사화 지기 전에』의 시인(시적 화자)은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드는 강골 기질이 충만한, 혁명을 꿈꾸는 낭만주의자다. 이름조차 사라진 “내가 세 살 때부터 자란 황화”(「황화」)역에는 ‘이건행’이라는 열차가 정차해 있다. 시인은 열차가 후진해 멈출 때마다 흉중에 품고 있던, 미처 소설로 풀어놓지 못한 절절한 이야기들을 고백과 참회의 형식으로 들려준다. “사람과 사람을 만나 피어난 이야기”(「시인의 말」)를 길어올리는 이건행의 시는 “고민의 흔적”(「시」)이면서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 찾기라 할 수 있다.
정한용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는 “이 시집의 시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겠다. 하나는 시인이 지난 날 겪었던 사건이나 인물을 회고하는 작품이고, 두 번째는 생활 주변에서 만나는 사물과 풍경을 서정화시키는 작품이며, 마지막으로는 현실의 모순과 질곡을 진술하는 작품이다.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소재적 구분이라면, 그 내면을 관통해 흐르는 주제는 비교적 한 가지로 수렴된다. 나는 이것을 ‘삶에 대한 연민과 뭉근한 슬픔’이라고 요약하고 싶다.
시인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얘기하지만, 이건행 시인만큼 살갗에 통증으로 다가오는 내력을 적는 이는 많지 않다. 젊은 날의 묵은 사랑부터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눈물을 감춘 춤부터 애잔한 복수를 꿈꾸는 것까지, ‘혁명’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모든 아픔이 꼭꼭 눌려, 오랜 세월 발효되고 있다. 뭉근하게 상처 안쪽에서 전해져오는 슬픔, 이 막막한 통증이 시인의 가슴에서 새어나와 독자에게로 흘러가고 있다. 만약 독자가 이 시집을 읽고 슬픔을 슬픔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면, 비로소 우리는 시인이 꿈꾸었던 혁명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라며 이건행 시집의 의미를 부여했다.
작가 이건행은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한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장편소설 『세상 끝에 선 여자』(임권택 감독에 의해 ‘창’으로 영화화)를 펴냈으며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뮤지컬 ‘상대원 연가’의 모티브가 된 동명 시를 2015년 발표하면서 시 창작을 해오고 있다. 2021년 시집 『호박잎쌈』(디지북스공모 선정·이북)과 인문학 소개서인 『인문독서 가이드북』(편저)을 각각 펴냈다. 경제일간지 등에서 사건·미술·증권 담당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일간지에 ‘이건행 칼럼’을 연재하는 한편 인문학 책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 도서출판 북인 펴냄 / 값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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