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를 묻는 것
왜 꽃은 지는 것이며 사람은 왜 먹고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비는 종일 내리는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시의 격을 높여가는 시인 중 한 사람이 나석중 시인이다. 젊은이 못지않게 시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나석중 선생은 "죽기 전까지 10권의 시집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언제 말한 적이 있다.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2021년 출간한 시집 『저녁이 슬그머니』가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되었던 나석중 시인이 열 번째 시집 『하늘은 개고 마음은 설레다』를 현대시세계 시인선 174번으로 출간했다.
“눈보라 속 남극 펭귄은 단 하나의 알을 발등에 올려놓고 품는다/ 인생은 빨리 늙고 반성은 너무 늦구나,/ 가마에서 꺼낸 도자기를 거침없이 망치로 깨뜨려보지 못했다”
나석중 시인의 시집 가장 앞에 실린 「시인의 말」은 시에 대한 지고지순한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한참이나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다.
눈보라 속 남극 펭귄이 단 하나의 알을 발등에 올려놓고 품는다는 진술은 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반성적 알레고리의 형식을 하고 있다. “단 하나의 알”을 품고 살지는 못하였다는 반성은 오로지 “시”만을 품고 살지는 못하였다는 반성이라 하겠다. 나아가 “가마에서 꺼낸 도자기를 거침없이 망치로 깨뜨려보지 못했다”는 반성의 비유적 실체도 시의 장인으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을 담고 있다.
나석중 시인의 시에서 눈여겨볼 제재 가운데 하나는 ‘돌’이다. 시인의 의식 속에 돌은 자신을 알아본 자에게만 은근한 미소를 전한다. 더욱이 언어 이전의 기원이 돌에 새겨져 있다는 인식은 의미심장하다. ‘언어의 표본’이라는 제목을 달아놓고 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침묵덩어리들은 빽빽한 언어의 숲/ 언어 이전의 언어의 표본”이라는 시적 진술은 수석장 안의 돌에 대한 이야기이다. 돌들의 침묵 속에 빽빽한 언어가 도사리고 있다는 말은 사물 안에 근원적 진리가 잠재해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단순히 의사소통의 언어로는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는 까닭에 돌이 하는 말을 “눈으로 가슴으로 듣”는 것이다. 강가나 바닷가에 뒹굴던 돌과의 만남은 “섬광” 같은 번쩍임이며 순간의 인연이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언어”로 소통한 자들에게 주어진 사건이자 선물인 셈이다.
시 「북한산」에서는 산 정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마음을 시적 화자는 “미움도 없”다는 정서적 발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측은지심의 연원은 인생을 한껏 살아온 노장의 혜안이라 할 수 있다. 하여 “올망졸망 사는 것들은 개미집 모양 측은하여라”는 시적 진술은 인간 세상의 영욕을 살아본 자의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일생을 다 읽어도 완독하지 못하고 뭐라 중얼거리며” 흘러가는 것은 계곡물이며 동시에 인간 삶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이끼 푸른 산기슭의 적요” 속에서 시적 화자는 고백한다. “다시는 하산하지 않을 날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조곤조곤 말하고 있다.
나석중의 시집에는 한 노장의 시를 향한 투신과 쓸쓸함이 곳곳에 배어 있다. 스님의 ‘게송’과 같은 발화 속에 끝내 육체적 인간으로서의 슬픔이 고여 있다. 어쩌면 이 지점이 나석중 시인의 본령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무사(思無邪)의 지경이란 몸으로 체득한 정신의 언어라는 사실을 그의 시들은 말하고 있다.
시 「종일 빗소리」는 마치 두보의 시를 보는 듯한 처연함이 서려 있다. 두보 시에 쓸쓸히 우는 원숭이 소리가 서경의 내면화라면 “종일 몸에 갇힌 빗소리”는 내면의 서경화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절창은 “무슨 의도를 묻겠다고 밖에 나간다면/ 낡은 지팡이 같은 몸으로는 낙상하기 십상이다”라는 구절이다.
예술이란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를 묻는 것이라는 명제가 있다. 그러나 육체적 신고(辛苦)는 이러한 물음마저 수월치 않게 한다. 왜 꽃은 지는 것이며 사람은 왜 먹고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비는 종일 내리는가 등등. 이 시에서 어떤 해탈을 노래했다면 전혀 다른 포즈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석중 시인답게 조금은 쓸쓸하지만 과장을 집어던지고 사실적 정황에서 시적 세계를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시적 격을 한껏 높이고 있다.
시단 데뷔 후 2년에 한 권 꼴로 시집을 출간할 때마다 시어들이 단아해지고 깊이도 깊어진다. 해설을 쓴 우대식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중국의 두보 시를 보는 듯한 절창의 시를 쏘"고 있다고 한다. 올해로 시단 데뷔 만 20년째 그가 원하던 그 10번째 시집 『하늘은 개고 마음은 설레다』가 교보문고와 알라딘, 예스24 등 인터넷서점과 대도시 유명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시인 나석중은
1938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저녁이 슬그머니』, 『목마른 돌』, 『외로움에게 미안하다』, 『풀꽃독경』, 『물의 혀』, 『촉감』, 『나는 그대를 쓰네』, 『숨소리』를 출간했다. 시선집 『노루귀』, 미니시집(전자) 『추자도 연가』, 『모자는 죄가 없다』, 디카시집(전자) 『라떼』, 『그리움의 거리』를 선보였다. 시집 『저녁이 슬그머니』가 2021년 아르코 제2차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되었다. 현재 빈터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도서출판 북인 펴냄 / 값 11,000원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