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로 세상읽기】 미국인들에게 잊힌 한국전쟁

김위영 산업번역 크리덴셜 대표 승인 2021.08.16 09:00 | 최종 수정 2021.08.16 13:11 의견 0

한국전쟁에서 미군 병사 3만6,568명이 사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잊힌 전쟁’이라 부른다. 미국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서적은 많으나 상대적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책은 별로 없다는 것도 한 증거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인들이 쓴 한국전쟁에 대해 정리해 보기로 한다.

◆ <The Korea War(한국전쟁, 2010년)>

미국에서 한국전쟁에 대해 가장 진보적이며 수정주의 해석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시카고대학 역사학과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 1943~ ) 석좌교수는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한국전쟁의 기원, Volume 1, 2, 1981년)>이란 저서에서 1945~1950년의 남한정부의 구조적인 모든 상황을 분석하면서 남한의 북침설을 주장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1991년 소련이 붕괴된 뒤 해금된 소련 자료를 근거로 남한의 북침설을 수정했다.

<한국전쟁>은 미국인을 위해 쓴 한국전쟁에 대한 안내서이다. 저자는 한국전쟁을 일본 식민지통치 기간(1910~1945)의 특징이었던 계급 간 분열과 항일투쟁 과정의 분열에서 비롯된 내전으로 본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 공군의 무차별적인 북한 포격, 민간인 학살 등과 남한정부의 대전교도소 및 제주4.3 민간인학살 등도 언급한다. 한국전쟁에 대해 종합적으로 분석한 명저이다.

Forgotten, never known, abandoned: Americans sought to grab hold of this war and win it, only to see victory slip from their hands and this war sink into oblivion. A primary reason is that they never knew their enemy – and they still don’t. --P xv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전쟁, 버려진 전쟁이었다. 미국인은 그 전쟁을 장악하고 승리하려 했으나 승리는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갔고, 전쟁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한 가지 주된 이유는 그들이 적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American historians have consistently revised their views on the Korean War: called a “police action” in the 1950s, it became the “limited war” in the 1960s, a civil war or “forgotten war” or “ unknown war” in the 1970s and ‘80s, and in the 1990s new archives in Moscow were used to argue that it was exactly the war Truman said it was at the time Kremlin aggression, which he tightly resisted. For the majority of Americans the war is forgotten and buried. --P 228

미국 역사가들은 한국전쟁에 관한 견해를 끊임없이 수정했다. 1950년대에 ‘치안활동’이었던 한국전쟁은 1960년대에는 ‘제한전’이었고, 1970~1980년대에는 ‘내전’이나 ‘잊힌 전쟁’, ‘알려지지 않는 전쟁’이었다. 1990년대에는 모스크바의 새로운 기록들을 이용하여 그것이 정확히 당시 트루먼이 말했던 '크렘린의 공격'이었고, 그는 강하게 저항했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미국인에게 한국전쟁은 잊히고 묻혔다.

Eventually, the Korean War will be understood as one of the most destructive and one of the most important wars of the twentieth century. Perhaps as many as 3 million Koreans died, at least half of them civilians(Japan lost 2.3 million people in the Pacific War). This war raging off Japan's coast gave its recovery and industrilaization a dynamic boost, which some likened to "Japan's Marshall Plan." --P 243

결국 한국전쟁은 20세기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쟁의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전쟁의 하나이다. 아마도 무려 3백만 명의 한국인 죽었으며, 그중 최소한 150만 명은 시민이었다(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2백30만 명을 잃었다). 일본 연안에서 광기를 떨친 한국전쟁은 일본에게 태평양전쟁 복구와 공업화라는 역동적인 경기부양을 안겨주었고, 일부는 ‘일본의 마셜플랜’으로 비유한다.

Finally, it was this war and not World WarⅡ which established a far-flung American base structure abroad and a national security state at home, as defense spending nearly quadrupled in the last six months of 1950, and turned the United States into the policeman of the world. --P 243

마지막으로, 1950년 후반 여섯 달 동안 미국의 방위비가 거의 4배로 증가하고, 광범위한 해외기지를 건설하고, 국내에서 안보국가를 수립한 것도 그리고 미국을 세계 경찰국가로 만든 것도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 <The Coldest Winter(가장 추운 겨울, 2007년)>

미국 하버드대학 출신으로 베트남전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가이자 언론인이었던 David Halberstam(데비드 핼버스탬, 1934~2007)이 쓴 유작이다. 원고를 탈고하고 5일 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저자는 한국전쟁이 냉전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미국, 소련, 중국, 일본이 참여하여 발발한 세계전쟁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한다.

맥아더 장군은 중국이 절대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해서 9월에 월동장비 없이 미군을 북으로 진격시키는 오판을 했고, 미국은 가장 추운 겨울과 싸워야 했다. 스탈린은 미군이 한국전쟁에 절대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오판으로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을 승인했다. 김일성은 혁명가로서 자신의 인기만으로도 인민군이 남한에 입성하면 약 20만의 남한 농민들이 봉기할 거라고 착각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으로만 알려진 맥아더의 야망에 대한 분석은 새롭다. 족보까지 파헤치면서 맥아더의 허상을 밝혀냈다. 맥아더는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 섬에서 통수권자인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으나 무시하고 거수경례도 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이를 이용했다. 지금 미국은 맥아더를 잘못된 지휘로 국가를 위험에 빠뜨린 장군으로 평가한다. 한국전쟁은 리지웨이 장군이 유리한 상황으로 돌려 휴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Korea would not prove a great national war of unifying singular purpose, as World war Ⅱ had been, nor would it, like Vietnam a generational later divde and thus haunt nation. It was simply a puzzling, gray, very distant conflict, a war that went on and on and on, seemingly without hope or resolution, about which most Americans, save the men who fought there and their immediate families, preferred to know as little as possible. --P 2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처럼 일치된 목표를 세우고 참전한 국가적 전쟁도 아니고, 그로부터 한 세대 뒤에 벌어진 베트남전쟁처럼 미국을 괴롭히고 분열시키는 전쟁도 아니었다. 단지 헷갈리고 어정쩡하게 먼 곳에서 일어난 충돌이었으나, 겉보기에는 희망도 결의도 없이 계속 이어진 전쟁이었다.

Truman and MacArthur were almost never on the same track, with the same aims. They saw the war that they were about to fight in different contexts; --P 136

트루먼과 맥아더는 동일한 선상에서 같은 목표를 가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전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싸워야 한다고 보았다.

Of the American military miscalculation of the twentieth century, Douglas MacArthur’s decision to send his troops all the way to the Yalu stands alone. --P 369

미군이 20세기에 범한 최대의 오판은 맥아더가 군대를 압록강까지 보낸 것이다.

Perhaps all wars are in some way or another the product of miscalculations. But Korea was a place where almost every key decision on both sides turned on a miscalculation. --P 631

모든 전쟁은 어떤 식이든 일종의 계산 착오의 산물이다. 하지만 한국은 양측 군대가 내린 모든 핵심적인 결정이 하나같이 잘못된 계산에 근거한 곳이다.

But whatever else, the Americans were willing( because of their broad anti-Communism) to have their sons die on Korean soil, and they were not there as conquerors or, in classic sense, imperialists. --P641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자식들이 한국 땅에서 죽도록 했으며, 미국인들은 정복자나 고전적 의미로 제국주의자로서 한국에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광범위한 반공산주의 때문이었다.

한국전쟁과 맥아더 장군

맥아더는 대통령에 출마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개입하지 않는다’거나 ‘1950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끝난다’는 등 진실을 은폐하고 언론 플레이를 하면서 미국 여론을 오도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대통령을 무시한 행동을 이유로 맥아더 장군을 해임했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맥아더는 상원 청문회에서 맥아더와 상반된 주장을 전개한 부하들에 의해 모든 진실이 밝혀져서 낙마했다. 맥아더에 비해 경력은 초라하나 그와는 다르게 전투에서 발생한 전공(戰功)을 부하들과 공유한 아이젠하워 장군이 트루먼의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맥아더 장군.

◆ <This kind of war(이런 전쟁, 1963년)>

미국 텍사스 출신의 역사저술가인 Theodore R. Fehrenbach(시어도어 페렌바크, 1925~2013)는 한국전쟁에 72전차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저자가 한국전쟁 참전 미 장병들의 생생한 증언과 공식기록, 작전계획, 전문, 일기, 역사기록물, 회고록, 신문 등 방대한 자료들을 모으고 세밀한 검증을 거쳐 1963년에 출간한 한국전쟁사다. 미국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전쟁사이며, 전쟁을 준비하지 않는 미국을 되돌아보는 미국판 <징비록>이다.

More than anything else, the Korean War was not a test of power --because neither antagonist used full power — but of wills. The war showed that the West had misjudged the ambition and intent of the Communist leadership, and clearly revealed that leadership’s intense hostility to the West. --P ix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은 힘을 시험한 전쟁이 아니라 의지를 시험한 전쟁이었다. 쌍방 중 누구도 완전한 힘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서방이 공산권 지도부의 야망과 의도를 오판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공산권 지도부가 서방에 대해 가진 강력한 적대감을 분명히 드러냈다.

The object of warfare is to dominate a portion of the earth, with its peoples, for causes either just or unjust. It is not to destroy the land people, unless you have gone wholly mad. --P 290

전쟁의 목적은 정의롭든지 정의롭지 않든지 간에 지구의 한 부분과 그 국민을 지배하는 것이다. 완전히 미치지 않고서는 전쟁을 일으켜 땅과 사람을 파괴하지 않는다.

The Korean War, never declared, never ended. More than two million human beings had died, forty thousand of them American soldiers and airmen, in what was a skirmish, nothing more. Nothing had been won, nothing gained – except that the far frontier had held. At a great price, a little time had been bought. --P 451

한국전쟁은 선전포고도 없었고, 결코 끝나지도 않았다. 2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계획에 없던 교전에서 미 육군과 공군 4만 명이 사망했다. 가장 멀리 있는 전선을 지켰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승리도 이익도 없었다. 엄청난 비용으로 짧은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A nation that does not prepare for all the forms of war should then renounce the use of war in national policy. A people that does not prepare to fight should then be morally prepared to surrender. To fail to prepare soldiers and citizens for limited, bloody ground action, and then to engage in it, is folly verging on the criminal. --P 453

모든 종류의 전쟁에 대비하지 않는 국가는 국가정책에서 전쟁의 사용을 포기해야 한다. 싸울 준비가 되지 않는 국민은 정신적으로 항복할 준비를 해야 한다. 제한적으로 피 흘리는 지상작전을 대비하기에 실패한 군인과 시민을 작전에 개입시키는 것은 범죄에 가까운 어리석은 짓이다.

These were the Korean War — the misery, the waste, the splendor, the courage, the trauma that lingers still. Millions of Americans can find no meaning in any of it. It is while men talk blithely of the lessons of history that they ignore them. The lesson of Korea is that it happened. --P 456

이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고통, 낭비, 영광, 용기, 트라우마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수많은 미국인들은 이러한 어떤 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이 역사의 교훈을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것은 그 교훈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교훈은 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 <On Desperate ground(사지(死地)에서, 2018년)>

미국 테네시스 출신의 역사저술가이자 언론인 Hampton Sides(햄프턴 사이즈, 1962~ )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잔인했던 장진호(Chosin) 전투를 벌인 미국 해병대원들과 직접 만나 행한 인터뷰와 사료를 통해 ‘불굴의 영웅’들이 남긴 감동적인 실화를 담고 있다. 흥남에서 월남한 후 미군 해병대의 통역관으로 장진호 전투에 참여한 재미 의사 이배석 박사의 가족 일화도 소개된다.

The Marines had a tradition of being the first to fight, the first to kill, the first to die. They didn’t earn their reputation by asking many questions. In a few months, they would face the armies of the most populous nation on earth and would become engaged in one of the more harrowing clashes in the history of warfare. --P 5

해병대는 가장 먼저 싸우고, 가장 먼저 죽이고, 가장 먼저 죽는다는 전통이 있다. 그들은 많은 질문을 통해 명성을 얻지 않았다. 몇 달 안에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 군대와 마주할 것이고, 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 중의 하나에 관여하게 될 것이다.

In the end, Mao scoffed at America’s supposed superiority —even its atomic weapons were no match for China’s fighting spirit. America, the thought, was but a paper tiger. “Weapons are an important factor in war, but not the decisive factor,” he said. “It is people, not things, that are decisive.” --P 68

결국 마오쩌둥은 미국의 우월성을 비웃었다. 심지어 미국의 핵무기도 중국의 전의(戰意)에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기는 전쟁에서 중요한 요소이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Said one Marine: “I’d follow him to hell because I know he’d get me out.” --P 236

한 해병대원이 말했다. “전우가 나를 구해줄 것을 알기에 나는 지옥이라도 그를 따라갈 것이다.”

Dr. Lee and his wife, Mi-yong, who was rescued from Hungnam with her family abord the SS Meredith Victory, live in Cincinnati. Today, more than a million South Koreans trace their lineage back to survivors rescued during the Hungnam Evacuation. --P 334

메리디스빅토리호를 타고 가족과 함께 흥남에서 구조된 이배석 박사와 그의 아내는 신시내티에 살고 있다. 오늘날 흥남 철수 중에 구조된 생존자의 남한 후손들은 100만 명이 넘는다.

Although more than 1,8 million American served in Korea, and more than 33,000 Americans were killed in action there, it’s often said to be our “Forgotten War,” a kind of also-ran in our historical consciousness. Certainly, compared to World War Ⅱ or Vietnam, Korea has gotten short shrift in our films and literature, and aside from endless returns of M·A·S·H, it seems have had scant purchase on our national imagination. why is this? Maybe in part it’s because the war ended in stalemate. --P 340

1,800만 명이 넘는 미군이 한국에서 복무했고, 3만3,000명 이상의 미군이 그곳에서 전사했지만 종종 우리의 역사의식 속에서도 잠재된 일종의 ‘잊힌 전쟁’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제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과 비교하여 한국전쟁은 영화와 문학에서도 관심 없이 다루어지고, <M·A·S·H>(미군 야전병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의 끝없는 순환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국가적 상상력을 거의 사로잡지 못했다. 왜 그런가?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전쟁이 교착상태로 끝났기 때문일 것이다.

◆ <The Cold war(냉전, 2005년)>

냉전사의 수장이자 냉전 역사학자들의 학장이라 불리는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John Lewis Gaddis(존 루이스 개디스, 1941~ )는 한국전쟁을 ‘냉전의 연장’으로 고찰한다.

The only decisive outcome of the war was the precedent it set: that there could be a bloody and protracted conflict involving nations armed with nuclear weapons —and that they could choose not to use them. --P 50

한국전쟁의 유일한 결정적 결과는 핵무기로 무장한 나라들이 개입하여 피 흘리고 장기화된 전투를 벌였지만 핵무기 사용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선례를 세운 것이다.

It began with a return of fear and ended in a triumph of hope, an unusual trajectory for great historical upheavals. --P 366

냉전은 공포가 되살아나면서 시작되었고, 거대한 역사적 격변에 대한 이례적 궤적인 희망이 승리하면서 끝을 맺었다.

20세기 국제전략가 Henry Kissinger(헨리 키신저, 1923~ )는 <On China(중국 이야기, 2012년)> 제5장에서 한국전쟁에 대해 35페이지를 할애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비긴 게임 이상이었다. 중국은 군사 강국인 동시에 아시아 혁명의 중심으로 확립되었다. 미국은 북한의 침공을 저지하는 목적만 이루었다. 최대 패자는 스탈린이다. 중국을 미국과 적대적으로 만드는 것도, 소련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좁은 목(the narrow neck)’에 해당하는 평양-원산 라인에서 진격을 중단하고 중국과 ‘완충지대(a buffer zone)’를 만들었다면 손자병법의 충실한 제자인 마오쩌둥이 이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과 무차별 공중폭격을 사과하고 화해해야 비로소 평화협정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도 베트남정부에 한국군이 자행한 양민학살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정한 사과가 상호간의 화해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미국이 남북전쟁을 통해 한 나라로 통합된 후에도 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치유하는 데 100년이 걸렸다고 한다.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고, 국제정세에 따라 번개처럼 통일이 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언제나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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