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기억】빛과 소금의 길
_비금도, 건너 도초도
유성문 주간
승인
2021.12.15 22:44 | 최종 수정 2021.12.15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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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그리워 바다는 자꾸만 목이 말라
바람으로도 헤치지 못하는 그리움 때문에
바다는 타들어가고
눈이었을까, 눈이었겠지
오래된 시간은 그렇게 제 몸 밖으로
몸을 드러내 보이고
내리는 눈은, 눈은, 눈은
하염없이 세상 밖으로 흩날려가는데
눈물로 출렁이는 나는 그래도 자꾸만 빛만 바라봐
-졸시 <소금바다-비금도 가는 길>
겨울은 깊어가는데 소금밭으로 가려는 것은 어인 까닭인가. 소란의 한복판에서 그래도 그리운 것은 빛이다. 다도해의 그 많은 섬 가운데 날개를 활짝 편 새를 닮은 비금도(飛禽島)는 ‘소금섬’이다. 비금도에서 빛은 소금이 된다. 물을 끌어올리는 수차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나마 한여름에는 염부(鹽夫)들이 대파·소파(소금을 걸러내는 밀대)로 바다를 밀고 다닌다. 그 힘에 의해 바다는 평등해지고, 마침내 시간은 결정으로 남는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 : 13>
염질이 끝난 겨울의 소금밭은 스산하게도 시간의 기억만 가득하다. 몸을 풀어버린 바다는 물비늘이거나, 서걱이는 얼음이거나, 눈이거나 아니면 염기를 빨아들인 뻘로라도 빛을 드러내 보이려 한다. 하지만 상처에 닿는 염기는 다만 통증일 뿐이니. 그 통증이 비록 상처를 증발시킬지라도.
썰렁한 다리 하나를 건너 도초도를 달려보지만 여기서도 잔인한 시간의 기억들을 밟고 가야 한다. 마지막 남은 까치밥마저 떨구어버린 시목(柴木)해수욕장에 서면 멀리 우이군도의 섬들이 아련하다. 우이도의 모래등은 여전할까. 풀풀거리며 또 누군가의 귀에 대고 제 기억을 속삭이고 있을까. 나는 오래된 시간의 줄기세포 하나를 슬쩍 빛의 바다에 던져버렸다.
* 누군가 목포 앞바다에 떠있는 다도해의 섬들을 일러 ‘다이아몬드제도’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다. ◇형 안에 들어가는 크고 작은 섬들을 그렇게 부른 것인데, ‘암태도 소작쟁의’ 하며, ‘하의도 농민운동’ 하며, ‘장산들노래’ 하며 그 섬들에 박힌 속내는 깊고 깊지만 섬과 섬 사이를 뛰노는 빛들을 보면 한편으로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서라. 다이아몬드는 영롱하지만 그를 둘러싼 탐욕이 빚어낸 피의 역사를 두고 또 누군가는 ‘다이(die) 아몬드’라 부른다.
갯벌과 염전, 그리고 느린 삶
-증도
1970년대 중반 증도 앞바다에서는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한 어부의 그물에 고기 대신 도자기가 무더기로 걸려 올라온 것이다. 바로 그 바다 밑에는 중국 송·원대 때의 유물을 가득 실은 선박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때부터 증도는 ‘보물섬’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하지만 증도의 진짜 보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청정 갯벌과 염전이다. 증도의 갯벌은 게르마늄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피부노화 방지와 보습효과가 뛰어나 화장품의 원료로 사용될 정도다. 또한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이르는 광활한 염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소금 산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증도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몰리는 곳은 아무래도 우전해수욕장 일대다. 해수욕장과 레저시설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해수욕장 북쪽 갯벌에 이 섬의 명물인 ‘짱뚱어다리’가 놓여 있는 까닭이다. 길이 470m의 짱뚱어다리는 너른 갯벌과 그에 기대 사는 바다생물들을 관찰하기에 적격이다. 갯벌에는 짱뚱어뿐만 아니라 농게와 칠게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아예 갯벌로 내려가 그들과 놀다보면 어느덧 해가 저물고 다리에는 간접조명이 비치면서 더없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우전해수욕장에 들어선 ‘엘도라도’ 리조트는 그 이름부터가 역설적이기도 하고, 소박한 섬 풍경과는 어딘지 어색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너그러이 봐 줄만 하다. 증도는 난개발을 막기 위해 숙박업 허가를 쉬 내주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민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혹여 그를 불편하게 여길 까다로운 이들을 위해 그쯤은 살짝 눈감아 주기로 하자. 증도의 민박집들 중에는 백합어장을 겸하는 집들이 있어 직접 백합 캐기 체험을 해볼 수도 있고, 또 이 섬의 식당들에서는 별미인 병어를 맛볼 수도 있다.
증도에 다리가 놓이면서 이제 먼 길을 달려서도 또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불편은 없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와 함께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던 다른 어떤 것 또한 따라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지척인 섬과 뭍조차도 몇 시간씩 기다려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뭍과 단절되어 있어 오히려 지킬 수 있었던 소박한 인심과 느린 삶, 그것이 어느 순간 덧없이 사라져버리지나 않을는지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이는 것은 비단 외부인의 속 모르는 한갓진 소리만은 아니리라. 다소 느리더라도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곳이 진정 우리가 그리워하는 엘도라도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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