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 그리고 덜미에 부딪혀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김명인 <동두천Ⅰ> 중에서
2004년 5월 24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이용남은 양주 56번 국지도 곁에 세워진 효순·미선 추모비 앞에서 제초제와 소주 두 병을 섞어 마시고 중태에 빠졌다. 현장에는 한 장의 메모가 남겨졌다.
“웃긴다. 세상이 참 웃긴다. 애꿎은 농민의 땅을 거저 챙기고 이에 항의하면 친북주의자라고 매도하는 보수 세력과 일부 언론이 웃긴다. (…) 재산세는 농민이 내고 사용은 미군이 하는 초헌법적인 일들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스토리사격장 반대를 외치는 농민들을 정부는 반미주의자로 몰아가고 있다. (…) 나는 꿋꿋해야 한다. 그까짓 농약에 내 정신이 혼미해져서는 안 된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효순이, 미선이 추모비를 바라봐야 한다. 내가 너무 곤두세우고 있어서 그런가. 난 쓰러지면 안 된다. 내가 쓰러지면 효순이, 미선이 원한을 갚을 수 없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 등 파주 일대 미군 문제를 파헤쳐온 그는 효순·미선 2주기를 맞아 추모비를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으로 후송되어서도 한때 치료를 거부하기까지 했던 그는 끝내 다시 일어섰지만, 나는 활짝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그 어린 넋들 앞에서 제초제는 빼고 소주 두 병만 마셨다. 그리고 사진작가도, 시인도 아닌 나는 그저 이렇듯 시늉하며 비끼어 갈 뿐.
내 비록 길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지만/ 길에서 죽은 넋을 만나는 것은 가장 서럽다/ 누이여, 죽음의 아스팔트 가까이/ 오래된 물푸레나무 한 그루 서 있단다/ 장갑차 훈련장으로 갇혀버린 이 나무는/ 그래서 가장 천연기념물다운데/ 군복색 잎들을 모두 벗어버린 나무 아래서/ 나는 잠시 갈피를 잃는다/ 이놈을 회초리 삼아야 할지 도끼자루로 써야 할지/ 나를 매 때리고 기어이 서슬 푸른 도끼날로 동두천까지 달려가야 할지/ 눈물로 푸른 나무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위의 나는/ 보산동 그 쓸쓸한 기지촌 곁에 힘없이 누워버린다 -졸시 <동두천 가는 길>
그래, 여기는 동두천이다. 스물세 살의 젊은 김명인 선생은 이곳 한 고등학교에서 월급 만 삼천 원을 받으면서 양공주 자식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쳤다. 끝끝내 가르치지 못한 남학생들과, 아무것도 더 가르칠 것 없던 여학생들을. 매일처럼 교무실로 전갈이 오고, 담임인 그가 뛰어가면 교실은 어느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죄가 된 고아들과 보산리 포주집 아들들이 의자를 던지며 패싸움을 벌이고, 화가 난 그가 반장의 면상을 주먹으로 치니 이빨이 부러졌고. 함께 울음이 되어 넘기던 책장, 꿈꾸던 아메리카.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김명인 <동두천Ⅳ> 중에서
그 아이는 대전 어디쯤에서 다방 레지로 떠돌다가, 아니 그보다 더한 데를 떠돌다가, 끝내 아메리카로 가지 못하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면 그래도 고향이라고 동두천으로 돌아와, 또 그 둘레를 떠돌다가, 어쩌면 그토록 소중하고도 부질없는 자궁 속에 이물질이 박힌 채 죽어갔을지도 모를 일인데…. 나는 여직 보산동 그 숱한 영어 간판들은 그렇다고 치고, 드문드문한 모국어조차도 그 뜻을 좀체 헤아릴 길이 없다.
걸어가면 발바닥에 돋는 피 어느새 저녁이 되어/ 공지에 떨어지는 바람 안개는/ 한 벌판을 지우고 돌아서고 있다/ 내 귀에 갇히는 새는/ 떠돌 곳은 다 떠돌아서 이곳 또한 정처 없나니/ 세상에 기댈 곳 없고 내 뜻인가 우리들은/ 철길에 들풀처럼 쓰러져 있다 -김명인 <동두천Ⅸ> 중에서
‘쏘리 쏘리’ 그렇게 미안하다며 흘러가던 신천 물소리를 건너면, ‘바람소리 허둥대는’ 마차산 골짜기에 시인이 근무하던 신흥실업고등학교(현 신흥중고등학교)가 있다. ‘깊은 밤중에만 위독해지던 시간’ 속의 하숙집을 돌아, 다시 여전히 ‘쏘리 쏘리’ 그렇게 미안하다며 흘러가는 신천 물소리를 건너면, ‘기차가 멎고 눈이 내리는’ 동안역이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혀 와 끼얹는 바람. 그래,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더는 어쩔 수 없는 동두천을 벗어나 내쳐 북행하면 소요산에 닿는다. 소요산에서 원효는 요석공주와 도피행각을 벌인다. 그가 ‘소요’ 끝에 ‘자재’하기까지, 어린 설총은 산 아래 별궁터에서 자라났다. 보산동의 공주누이들과는 달리 그때 파계의 도반은 그래도 VIP라고 별궁까지 지었던 모양이다. 갈지자로 비틀거리는 심사는 잠시 이두문자라도 빌어 풀어내야 했을 터인데, 그조차 한탄강 그 찬 여울 앞에서 막혀버린다. 떠돌 곳은 다 떠돌아서 이곳 또한 정처 없나니.
─
동두천 가는 길에 굳이 파주 무건리의 물푸레나무(천연기념물 286호)에게 들를 필요는 없다. 길도 에둘러 가야 하고, 지금은 그 무성한 이파리마저 다 떨어졌으며, 간혹 군사작전이라도 있을라치면 통행에 통제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가는 길이든 돌아오는 길이든 양주 광적면 56번 국지도 곁에 있는 효순·미선 사고지는 한번쯤 들를 일이다. 그것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진 두 꽃송이에 대한 최소한의 사죄이므로.
_PS
시인 김명인(1946~ )은 1969년 동두천에서 교편을 잡던 9개월 남짓의 기억으로 연작시 <동두천>을 썼다. 그의 첫 시집 《동두천》이 나온 게 1979년이었으니까 벌써 40년이 되었다. 그가 동두천에서 머물던 40~50년 전의 상황은 지금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동안 처참한 윤금이 살해사건도 있었고, 예순여덟의 ‘히빠리(클럽에 소속되지 않고 혼자 매춘을 하는 나이 든 여성)’ 서정만 살해사건도 있었고,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도 있었다. 한때 2만명에 달하던 동두천지역 미군이 평택으로 이전한 이후 동두천 보산동 기지촌 일대는 대대적인 경기활성화 사업에도 불구하고 쇠락한 분위기가 역력하다.
저작권자 ⓒ 고양파주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