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이카루스, 그 욕망과 비극들

혜범 작가/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2.07.26 02:26 의견 0

인간동물들은 날아오르고 싶어 했다. 서로를 밟아가며 꼭대기를 향해 오르려는 욕망들, 사바는 그 욕망들의 거탑이었다.

오래전 일산 마두역 성모정형외과에 입원해 있을 때, 창밖으로 내다보니 아침이 되면 많은 무리의 인간동물들이 어디론가 줄을 지어 가고 있었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혹은 지하도를 빠져나오는 무리들. 내 눈엔 모두 욕망으로 보였다.

그 인간동물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왜 줄지어 한 없이 걷고 있는지 궁금하여 대열의 맨 뒤에 걷고 있는 인간동물들에게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봐요, 대체 어딜 향해 그리 바쁘게 줄지어 가고 있는 건가요?”

“아, 이 답답한 양반을 봤나. 스님도 얼른 따라붙기나 해요. 이 대열을 따라 걷지 않으면 무리에서 뒤처지고, 앞의 사람들을 놓치게 되니까….”

먹고 자고 애써 일하고 그랬다. 그 인간동물들이 왜 그 대열에 서고, 왜 그 무리를 뒤따르는지. 그것도 모르고 대열에 합류해 있는 인간동물들도 많았다.

“아... 난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이 길이 맞는 걸까?” “남들에게 뒤쳐지면 어떡하지?” “남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근사하게 보이진 않아도 뒤쳐진 사람으로 보이진 않아야 할 텐데 말이야….”

알고도 도 모른 체 길을 재촉하고 있는 동물들도 있었고. 행여나 그 대열에서 떨어질까 두려워하면서.

​교통사고로 인해 나는 모든 일상이 멈추어진 상황이었다. 나도 그리 살아왔고, 오늘의 나 역시 그 물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이 길을 왜 걷고 있는지도 잊었다. 사느라고, 그저 사느라 바빠, 바삐 살면서 그 목적, 가치에 대한 물음은 좀처럼 던지기 어렵다.

사진 | 유성문 주간

멈추니 보였다.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없으니 경비행기 하나 사려고 비행조종술을 배운 적이 있다. 로맹가리처럼. 셍떽쥐베리처럼. 그런데 나는 어디로 날아가려 했던가? 저 먼 소혹성으로 날아가 어린왕자, 선재동자처럼 문수보살을 만나고 싶었다.

비행 조종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있었다. 이륙, 수직상승 비행과 착륙이었다. 허공으로 뜰 수 있어야 비행을 하고, 하늘에서 착륙할 줄 알아야 다시 먼 우주에서 사바로 귀환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기에 이착륙 다음으로 배우는 것이 바로 좌회전 우회전, 상승 그리고 하강이었다. 그리고는 멈춤, 제자리 비행(hovering)이었다. 멈추면 보이는 것들, 불교에서는 이걸 단독비행자로서의 ‘지관(止觀)’이라고 한다.

그때, 나는 꼭대기로 올라가 떴다. 날았다. 드디어 아래가 내려다 보였다.

“아, 나는 어디를 날다, 이놈의 지구별로 불시착하게 된 거지?”

지관은 ‘지(止)’와 ‘관(觀)’의 합성어이다. ‘지’는 멈추어 모든 번뇌를 그치는 것이고,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이 적정해진 상태이며, ‘관’은 자신의 본래 마음을 관찰하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것, 즉 그대로의 진리인 실상(實相)을 관찰, 성찰, 통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추락해 멈추고, 제자리 비행(hovering)만 하고 있는 나, 그래서 경비행기 하나 장만했냐고? 교통안전공단 이사장이 발행한 초경량비행장치조종자, 2인승 경비행기 조종자격증만 가지고 있다. 그래도 됐다. 밤마다 나는 꿈으로 단독비행해서 당신에게 갈 수 있으니. 그런데 문제는 가끔 추락할 때 날개가 없어 곤혹스럽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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