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인생의 맛은 죽음에 있다

혜범 작가/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2.08.02 09:00 | 최종 수정 2022.08.02 09:37 의견 0

스님 행복하세요?

묻는다. 나는 미소 지었다.

스님 깨치셨어요?

그래도 미소 지었다.

나만의 방법, 해피 라이프를 즐기는 방법이다.

물어주는 이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듣는 이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그리 성공한 수행자는 아니다. 불교는 해탈과 열반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고 믿는 것이 핵심이다.

속박 없는 자유로움. 완전한 자유로움을 깨달음, 해탈이라 한다. 어떤 괴로움도 번뇌, 번민도 없는 삶. 행복한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내 수행의 목표도 그 해탈과 열반이었다. 내가 그 깨어남의 시간들에 실패했다는 건 나에게는 해탈과 열반이 모자라고 부족하기 때문이다.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건 한마디로 깨닫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실패한 수행자도 아니다. 왜냐? 그래도 세속의 팔풍에 끄달리지 않는 고요는 조금 있으니까.

살면서 죽음을 모면할 수는 없다.

삶의 한 부분으로 죽음은 시종 작동되고 있으니까.

나는 다른 수행자들과는 달리 죽음을 보기보다 삶 쪽에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천착한 편이다.

죽음보다는 삶 쪽을 성찰하므로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려 애썼다,

삶을 통한 바른 성찰로 존재의 실천적 접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살면서 죽음을 외면 할 수는 없었다.

실존자로서 중환자실에 발가벗고 누워보니 더 살고자 미련을 가지고 아둥바둥하다 죽는 이도 보았고, 또 덤덤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죽음도 보았으며, 그렇게 많은 죽음을 목도하고 다시 일어나 탄생, 백일을 축하하는 집에도 갔고, 장례를 집전하기도 했다. 또 타인의 죽음으로 오온 인간동물이라는 완전하지 못한 생로병사의 육체에 갇힌 내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야 ‘아, 삶뿐만이 아니라 죽음 또한 수행이구나’라는 마음이 들었다.

사진 | 유성문 주간

오랜 기간에 걸쳐 죽음이라는 장애에 시달려야 했다. 하여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고, 만져보고, 삶에 대해 더욱 소중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 인생의 맛은 죽음에 있는 거였다.

하여, ‘어찌 죽음을 준비하느냐?’의 문제는 ‘어찌 사느냐?’의 남은 생 평화로운 절차와 과정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생사에 걸림과 막힘이 없을 때 해탈과 열반이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탈은 뭐고, 열반이란 무엇인가.

탐진치 몸과 마음의 연기작용이 일어나도 그것에 결박,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를 깨달음, 보리, 해탈이라 한다.

삶이 곧 수행이고, 삶이 곧 깨달음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열반의 수단이 되는 것이고. 탐진치, 번뇌의 불이 완전히 꺼진 상태, 니르바나로 더 이상 그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때 열반이라 한다.

하여 나도 묻는 이에게 물었다. ‘사랑하십니까?’ ‘행복하십니까?’라고.

깨달음, 해탈은 진정한 자유이고 해방이며, 열반은 진정한 행복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 수행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해탈을 통해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 지금 여기 그 열반으로 가려는 고난의 도정, 그 길이 바로 우리 수행자들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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