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declared the formation of a new dynasty called the Qing(淸), which henceforth would rule over the Manchu and neighboring peoples, claiming greater power and a wider mandate than the Jin had done. Qing(pronounced “Ching”) literally means “pure” or “clear” and, from 1636 and the final abdication of the Manchus in 1912, was used as the dynastic term for the successive Manchu rulers and for China over which they ruled. Hong Taiji’s people were now to be called Manchus. --Jonathan D. Spence, The search for modern China, P.31
홍타이지는 새 왕조를 청(凊)이라 선포하고, 이 나라가 만주와 이웃 민족을 다스릴 것이며, 금(金)보다 더 강력한 권력과 더 넓은 영토를 가질 것이라 주장했다. ‘순수함’ 또는 ‘깨끗함’이라는 뜻을 지닌 청(淸)은 1636년부터 마지막 퇴위하는 1912년까지 만주족 통치자와 그들이 다스리는 중국을 뜻하는 왕조명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홍타이지의 백성은 이제 여진이 아니라 만주(滿洲)라 불렀다. --조나단 D.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 중에서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1636년 세운 중국의 마지막 제국 청나라는 1912년 멸망할 때까지 278년간 중국을 통치한 왕조였다.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한 제국으로, ‘멸청흥한(滅淸興漢)’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한 신해혁명(1911)으로 인해 자금성이 혁명군에 점령되면서 종말을 고했다. 청나라의 멸망 원인은 다양하다. 소수 만주족이 한족을 다스리다가 태평천국의 난(백련도의 난), 의화단의 난, 제국주의의 영토 점령(영국의 홍콩, 일본의 대만, 해안지역의 영·프·독·러·일 등의 치외법권인 조계지역), 양무운동과 청일전쟁, 관료들의 부패와 아편 만연,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건립 등으로 멸망에 이르렀다.
청나라가 멸망한 지 110년이 지났지만 <청사고(淸史稿)>만 출간되었고 아직 공식적인 ‘청사(淸史)’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청나라를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신해혁명을 일으켜 쑨원(孫文)을 초대 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의 탄생에 정통성을 두어 중국공산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마음속으로 업신여기는 청나라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것이 곤욕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청나라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중국공산당도 자신들을 지배했던 이민족인 청나라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The Search for Modern China(현대 중국을 찾아서, 1999)>
중국 근대사 연구의 최고봉으로 추앙받는 미국 예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Jonathan D. Spence(조나단 D. 스펜스, 1936~2021)는 다수의 인기 있는 중국 역사서를 출간했다. 본서는 명나라 말기인 1600년 무렵부터 청의 건국과 번영, 근대화 몸부림과 신해혁명, 반제투쟁과 국-공내전, 공산정권 수립과 문화혁명, 문호개방과 자본주의 실험 등 숨 가쁜 역사를 본문만 747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 속에 녹여낸다.
But beyond setting up four maritime customs office(one each in Guangdong, Fujian, Zhejiang, and Jiangsu) and trying to enforce an across-the-board tariff of 20 percent on foreign imports, the Qing state failed to develop the necessary mechanisms, preferring instead to work through system of kickback or purchased monopolies. With the arrival of more powerful Western traders in the eighteenth century, this decision was to be a fateful one. --P.57
그러나 청나라는 네 개의 해관(광동, 푸젠, 저장, 장쑤에 각 하나씩)을 설치하고 외국 수입품에 대해 20%의 전면적인 관세를 부과하는 노력 이상으로 필요한 조치를 개발하지 못했다. 대신에 리베이트와 독점(매점매석)에 치중하는 것을 선호했다. 18세기에 더욱 강력한 서양 무역상들이 도착했을 때 이런 결정은 숙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Perhaps Yongzheng’s most dramatic gesture in this direction was his decision to emancipate the “mean people” of China. This designation was applied to several groups who were considered social outcasts and were forbidden to serve in any government capacity or take the state exams. --P.88
아마 이런 방향에 대한 옹정제(雍正帝)의 가장 극적인 행동은 중국의 ‘천민’을 해방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이 조치는 사회적으로 버림받아 정부의 어느 곳에서도 일할 수 없고, 과거시험도 볼 수 없는 여러 집단에 적용되었다.
Much of the country's population growth in the eighteenth century was speeded up by a massive ecological change: the introduction of new crops into China from the New World. Sweet potatoes, for example, were widespread in coastal China by the mid – Qianglong’s reign, which maize and the Irish potato became common in the north and in the southwest in the same period. --P.95
18세기 중국 인구성장의 대부분은 대규모의 생태학적 변화로 가속되었다. 곧, 신제국에서 중국으로 새로운 작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구마는 건륭제(乾隆帝) 재위 중반 경에 해안지역에 널리 보급되었고, 옥수수와 감자는 비슷한 시기에 북부와 서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Qianlong’s most important achievement was the conquest and integration of huge areas of western territory—the region later known as Xinjiang, the “New Territories —into the Chinese state. By doing this he doubled the territorial extent of China, finally ended the Zunghar troubles, and fixed a firm western border with Russia to go along with the northern borders settled by treaties at Nerchinsk and Kiakhta. --P.97
건륭제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광대한 서역--후에 신장(新疆), 곧 새로운 영토로 알려진 지역--을 정복하고 중국에 복속시킨 것이다. 이로써 그는 중국의 영토를 두 배로 확장했고, 마침내 준가르부 문제를 해결했으며, 네르진스키와 카흐타 조약으로 정리된 북부 국경과 더불어 러시아와 서부 국경을 확고히 설정했다.
By the late nineteenth century, despite the foreign pressures and domestic turbulence, it looked as if the Qing might construct a viable new sythesis. But the many achievements in the application of foreign technology to China's military and industrial needs were shattered by two defeats that the Chinese suffered in brief yet bitter war -- one with the French and one with the Japanese -- that left much of China's vaunted “modern” navy at the bottom of the sea. --P.141
19세기 말에 외압과 국내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청은 서양과 중국의 새로운 통합을 이룩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중국의 군사적 및 산업적 필요에 따라 외국의 기술을 적용해 이룩한 많은 성과들이 두 번의 패배로 산산조각이 났다. 중국이 겪은 두 번의 짧지만 쓰라린 전쟁--한번은 프랑스, 또 다른 한 번은 일본과--은 중국이 자랑하던 ‘근대적’ 해군의 대부분을 바다 속에 수장시켜 버렸다.
Helpless in the face of a military mutiny that erupted in late 1911, the Manchus saw no choice by early 1912 but to abdicate their power and declare the Qing dynasty at an end. There remained a crucial vacuum at the center of the Chinese state and no specially talented leaders able to fill it, only various groupings with rival ideologies and claims. --P.141
1911년 말에 분출한 군사반란을 직면하여 속수무책이었던 만주족은 1912년 초에 권좌를 포기하고 청조(淸朝)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이 없었다. 국가의 중심에 결정적인 공백이 생겼으나 그것을 충족할 특별히 유능한 지도자도 없었으며, 단지 대립하는 이념과 요구를 지닌 다양한 집단이 있을 뿐이었다.
◆ <China’s Last Empire(중국의 마지막 제국, 2009)>
미국 명문인 존스홉킨스대학교 역사과 교수 William T. Rowe(윌리엄 T. 로, 1947~ )는 저명한 청대사 전문가로, 본서는 ‘하버드대학교 중국사’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되었다. 저자는 청나라를 내향적이고 폐쇄적이라는 표준적 학설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청나라를 소개한다.
THE GREAT Qing empire was by far the largest political entity ever to enter itself on the piece of earth known today as China. It more than doubled the geographic expanse of the Ming empire, which it displaced in 1644, and more than tripled the Ming’s population, reaching in its last year a size of more than half a billion persons. --P.1
대청(大淸) 제국은 오늘날 중국으로 알려진 중국 본토 지역에 진출한 가장 큰 정치적 실체였다. 청은 1644년에 몰아낸 명(明)보다 영토는 2배 이상 커졌고, 인구는 3배 이상 늘어나 청 말기에는 인구가 5억이 넘었다.
The Qing rulers wore many hats and governed their diverse constituencies(Jurchen, Mongol, Tibetan, Chinese) in different ways simultaneously. If the Qing ruler was the Son of Heaven for his Chinese subjects, he was also the Khan of Khans for the Mongols, the Chakravartin(Wheel-turning king) for the Tibetans, and so on. The Qing would be a diverse, multinational, and presumably universal empire, very different from the Chinese dynasties it succeeded. --P.17
청 통치자들은 많은 역할을 했다. 그들은 여러 부류의 신민들(여진인, 몽골인, 티베트인, 한인)을 동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스렸다. 청 통치자는 중국 백성에게는 천자(天子)였고, 몽골인에게는 칸 중의 대칸이었으며, 티베트인에게는 차크라바르틴(진륜성왕:轉輪聖王)이었다. 청은 다양하면서도 다민족적인, 그리고 추측건대 세계제국이었고, 중국을 계승한 여러 왕조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WHILE the Great Qing was an empire encompassing many disparate peoples, it was also a dynasty(guo) in the Chinese imperial tradition, and its ruling house confronted many of the same problems faced by its predecessors. The Chinese empire, the legacy of the First Emperor Qin Shihung in third century B.c.,had demonstrated throughout its long history that it could be conquered but not permanently fragmented. --P.31
대청(大淸)은 이질적인 여러 민족을 아우르는 제국이면서 또한 중화제국의 전통을 가진 왕조였고, 통치가문은 이전 왕조들이 겪었던 많은 동일한 문제에 직면했다. 기원전 3세기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중화제국은 정복될 수 있지만 영원히 해체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긴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었다.
No small reason for this success was the Qing’s astonishing good fortune to have on throne over the “long eighteenth century” three remarkably capable, hard-working, and(not least) long lived men—two of whom ruled for sixty years each—reigning under the titles Kangxi, Yongzheng, and Qianlong. --P.63
이러한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은 ‘장기 18세기’에 걸쳐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라는 3명의 매우 능력 있고, 열심히 일하고, 특히 장수한 사람들이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었고, 그는 청(淸)의 행운이었다. 이들 중 두 명은 각각 60년 동안 재위했다.
In its first century and a half on the throne, the Qing more than doubled the spatial expanse of the Ming empire and bequeathed to its twentieth –century successors most of the boundaries claimed today as China. For the many Qing soldiers, statesmen, and ideologists involved in this expansion, a “civilizing mission” not all that different from the European experience was associated with conquest. --P.73
청은 명을 정복한 후 150년 만에 명 제국의 공간적 팽창(영토)을 2배로 확장했고, 20세기 계승자에게 오늘날 중국이 주장하는 대부분 경계를 물려주었다. 청의 팽창에 기여한 수많은 무인, 정치가,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유럽의 경험과 다름이 없는 ‘문명화 임무’는 정복과 연관된 일이었다.
ALTHOUGH China‘s population has always been overwhelmingly comprised of farmers, and although China was long thought of in the West as the very model of an agrarian society, by the mid-Qing era was it was possibly the most commercialized country in the world. --P.122
중국 인구는 항상 압도적으로 농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서양에서는 중국을 오랫동안 전형적인 농업사회라고 생각했지만, 중기의 청은 세계에서 가장 상업화된 나라였다.
China was the Middle Kingdom(Zhongguo), the axis mundi, and the cultural practices of the Chinese elite were the universal norms of civilization. Those peoples who lived around the fringes of the Middle kingdom were all, in some form, barbarians. This distinction was not (or not primarily) racial but cultural. --P.133
중국은 세계의 중심 왕조(中國)로 세상의 중심이었고, 중국 엘리트의 문화적 풍습은 문명의 보편적 규범이었다. 중국의 주변 지역에 살았던 민족들은 어떠한 형태가 되었던 모두 야만족이었다. 이는 인종적 (또는 주로) 차별이 아닌 문화적 차별이었다.
January 1, 1912, of the Western solar calendar was proclaimed the founding date of the new republic of China. When the Xuantong emperor formally abdicated on February 12, not merely the Qing dynasty but also the two-thousand -year-old Chinese empire was gone. --P.283
서양력으로 1912년 1월 1일에 새로운 중화민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2월 12일 선통제(宣統帝)가 공식적으로 퇴위하면서 청 왕조는 물론이고 2000년의 역사를 가진 중화제국도 사라졌다.
Between the mid-seven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a remarkable entity known as the Great Qing Empire occupied an expansive and expanding space on the Eurasian continent. This was by no means the inward-looking and hermetic “Celestial Empire” that Western once believed it to be. On the contrary, its history was intimately intertwined with global historical processes in diverse ways that we are just beginning to comprehend. --P.287
17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대청제국으로 알려진 놀라운 실재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광활하고 확장된 영토를 점유했다. 이것은 서양인들이 한때 믿었던 내향적이고 폐쇄된 ‘천상의 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중국의 역사는 우리가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한 세계의 역사적 과정과 다양한 방식으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
◆ <China and Japan(중국과 일본, 2019)>
미국 하버드대학교 석좌교수이자, 동아시아 전문가인 Ezra F. Vogel(에즈라 보걸, 1930~ )은 서기 600년~2007년까지 중국과 일본의 1,500년간 교류의 역사에서 주요한 전환점들을 살펴보고, 한·중·일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덩샤오핑 평전>과 <저팬 애즈 넘버 원>으로 각각 중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AFTER THE BRITTISH defeated China in the First Opium War(1839-1842) and Commodore Perry Opened Japan in 1853, Asia could no longer maintain a separate existence. It began the process of becoming part of the world. --P.65
영국이 제1차 아편전쟁(1839-1842)에서 중국을 패배시키고, 1853년에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개방한 이후에 아시아는 더 이상 서구세계와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세계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While Japanese leaders were investing in industry and infrastructure, Korean and Chinese leaders were looking to restore a national spirit in their countries by displaying imperial grandeur through lavish new buildings. In 1860s the Koreans undertook a massive rebuilding of their palace, with some 330 buildings and nearly 6,000 rooms. --P.72
일본의 지도자들이 산업과 기반구조에 투자하는 동안에, 조선과 중국의 지도자들은 호화스러운 새 건물로 황실의 권위를 과시하여 자국 내에 민족정신을 회복하려 했다. 1860년대 조선은 330여 채의 건물과 거의 6,000개의 방이 있는 궁궐의 대대적인 재건에 착수했다.
Among the unequal treaties that were finally ended in 1946 was the one unequal treaty that has been forced on China by non-Western country, the Treaty of Shimonoseki, which Japan had imposed on China at the end od the Sino-Japanese War. --P.123
1946년에야 마침내 종료된 불평등조약 중에서 서구국가가 아닌 국가가 중국에게 강요한 불평등조약이 있다. 시모노세키조약으로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난 뒤 일본이 중국에게 강요한 것이다.
One territory that Japan had demanded was the area around Shenyang, which had no great strategic significance, but it was the location of the original Manchu capital and of the imperial tombs. Thus Manchu, rulers of China for three centuries, were throughly humiliated. Anti-Manchu sentiment became widespread, and sixteen years later the dynasty was overthrown. --P.127
일본이 요구한 영토 중 하나가 선양 부근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크지 않았지만 원래 만주족의 수도로 황릉(皇陵) 위치한 지역이었다. 3세기 동안 중국의 통치자였던 만주족은 철저한 굴욕을 당했다. 이후 반만주족 정서가 널리 펴져 나갔고, 16년 뒤에는 왕조가 전복되었다.
In the ultimate irony, nearly all Chinese students left Japan in 1911 as the forces for change engulfed China’s 2,000-year-old imperial system. Meant to infuse the system with new talent and moderate reform thinking, China’s Japan-trained youth ultimately contributed to its demise. --P.168
궁극적인 아이러니 속에서, 1911년에 변화를 추진하는 세력들이 2000년 동안 이어져오던 중국의 제정(帝政)을 침몰시켰을 때 거의 모든 중국인 학생들이 일본을 떠났다는 점이다. 새로운 재능과 온건한 개혁사상을 체제에 불어넣으려는 의도로 일본에서 교육시킨 중국의 젊은이들이 결국 청조(淸朝)의 종말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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