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stless Empire; China and the world since 1750(쉬지 못하는 제국; 1750년 이후 중국과 세계, 2012년)>
미국 예일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Odd Arne Westad(오드 아르네 베스타, 1960~ )가 지난 250년에 걸친 중국과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19세기와 20세기 중국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과 중국의 600년간의 관계를 다룬 <제국과 의로운 국가>를 2021년 출간하기도 했다.
Over the past two millennia it has an empire rather tan a country, but an empire with very open and very fluid borders. Its inhabitants have, until very recently, been defined by the civilization they were part of rather than by the way they look or the ancestors they have. --P.3
지난 2000년 동안 중국은 한 나라이기보다는 제국이며, 매우 개방되고 유동적인 경계를 지닌 제국이었다. 가장 최근까지 중국인들은 자신이 보는 방법이나 조상들에 의해서보다는 그들이 속한 문명에 의해 정의되어 왔다.
THE HISTORY OF MODERN CHINA’s foreign relations began with the Qing dynasty, which ruled for almost three hundred years, from 1644 to 1912. Under the Qing, China saw the peak of its power. --P.6
근대 중국의 외국과의 관계사는 1644년부터 1911년까지 거의 300년을 통치한 청조와 함께 시작된다. 청 제국 하에서 중국은 권력의 최고 정점을 보았다.
The Qing’s announced goal was to rule according to ancient wisdom as set out in the classic works of Confucianism. The Ming had failed, they declared, because its rulers had become lax and equivocal; they had seemed weak and without a sense of direction for generations. Now the Manchus, the outsiders, had arrived in order to rectify China and bring back its greatness. --P.7
청조가 공언한 목표는 유가 경전에 설계된 대로 고대의 지혜에 따라서 통치하는 것이었다. 명 왕조는 실패했으며. 그들은 통치자들이 해이하고 모호했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 명 왕조의 통치자들은 유약하고, 여러 세대에 걸쳐 방향감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외부인인 만주족은 중국을 바로잡고, 중국의 위대함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도착했다.
The treaty with Russia was China’s first with European power and was for the Qing a useful introduction to the practice of European diplomacy. --P.11
러시아와의 (네르친스크)조약은 중국이 유럽 열강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었고, 청조에게는 유럽적 외교의 실행에 유용한 입문이었다.
The past shapes the present. Today’s China is shaped by its modern metamorphosis, by the transformation wrought by both external and internal pressure. History is therefore the most fundamental background on which to understand present-day Chinese foreign relations. --P.16
과거는 현재를 형성한다. 오늘날 중국은 중국의 근대적인 변형에 의해 형성되며, 내적·외적 압력이 작용하여 변모했다. 그러므로 역사는 오늘날 중국의 외교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배경이다.
The Western attacks on China, beginning with the Opium War in 1839, meant that the empire had much less time to change than most people would have expected as the century began. Still, the Qing fought for its position both within China and outside. --P.20
1839년 제1차 아편전쟁(중·영전쟁)으로 시작된 중국에 대한 서구의 공격은 세기의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제국의 변화를 위한 시간이 훨씬 더 적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도 청조는 국내와 국외에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싸웠다.
CHINESE WHO ENCOUNTERED FOREIGNERS in the 1800—the forth year of the Jiaqing emperor’s reign—would in most cases have regarded them as yet another group of Qing dynasty subjects. The empire was vast and contained people of different skin colors, different languages, and different faiths. Although its physical borders were ill-defined, China’s political power covered much of Asia from the Korean penisula to the Tianshan mountains in the Central Asia and from Lake Baikal in Siberia to the coasts of Burma. Immediately outside the main circle of imperial control were the tributary states. --P.20
1800년대 외국인과 조우한 중국인들은—가경제(嘉慶帝) 통치의 4년—대부분의 경우에 이들 외국인을 청조의 또 다른 부류의 신민으로 간주했다. 제국은 광대했고, 다른 피부색과 언어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물리적 경계는 형편없이 모호했지만 중국의 정치적 권력은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의 텐산(天山) 산맥까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미얀마 해안까지 아시아의 많은 부분을 포괄하고 있었다. 제국이 직접 통치하는 영역의 바깥에는 조공국가들이 있었다.
Uneven growth was a major factor in development of the Chinese economy during the nineteenth century, but more crucial still were Western incursions into the country, which divide the century in two halves. The establishment in the 1840s and 1850s of foreign-run capitalist nuclei inside China was key to the country’s economic development. --P.26
불균등 성장은 19세기 중국 경제의 발전에서 중요한 요인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것은 19세기를 전반과 후반으로 가른 서구열강의 중국 침략이다. 1840년대와 1950년대 중국 내부에서 외국이 운영한 자본주의 핵심의 수립은 중국 경제발전의 열쇠였다.
After the Qing relaxed travel restrictions in the mid-eighteenth century, a second wave of emigration created large Chinese towns all over Southeast Asia. --P.27
18세기 중반에 청조가 해외이주 규제를 완화한 이후에 두 번째 대량이민의 물결이 동남아시아 전역에 대규모 차이나타운을 만들었다.
The Sino-British war, often called the Opium War, broke out in March 1839, nor because of Chinese attacks on foreign shipping, but because the Qing authorities attempted to protect vessels from abroad that were willing to break the British embargo. --P.41
아편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제1차 중·영전쟁은 1839년 3월에 일어났다. 중국의 외국선박에 대한 공격 때문이 아니라, 청조 관헌이 영국의 금수(禁輸) 조치를 깨뜨리려는 외국선박을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다.
But in the 1870s and 1880s, the Qing made a remarkable comeback. It was almost as if the elites within the empire had taken a hard look at their culture and decided to come out in its defense. Their Self-strengthening Movement was based on the idea that Western form—in defense and science, especially—could be combined with Chinese essence, meaning Confucianism. --P.54
그러나 1870~1880년대에 청조는 괄목할 만한 회복을 보여주었다. 청 제국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면밀히 관찰하고 제국의 방어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전개한 자강운동은 서구적 형태—특히 과학과 군사—가 유교를 의미하는 중국적 정수(精髓)와 결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었다.
The city served both as a depot and a refuge. It facilitated British trade all over the southern China, while becoming, in terms of its population, a Chinese city, attracting immigrants from all over the country: refuges, dissidents, entrepreneurs, and fortune hunters. --P.58
홍콩은 중계지이자 피난처로 가능했다. 홍콩은 중국 남부지방에서의 영국의 무역을 촉진했으며, 동시에 인구의 측면에서 중국 전역으로부터 피난민, 정치적 반대자, 기업가, 투기꾼 등의 이주를 유혹하는 중국인의 도시였다.
The different zones in these cities, whether Chinese—controlled or foreign—controlled, did much to create modern China, economically, culturally, and politically. With their complex systems of governance and social interaction, they provided the spaces in which the hybridity and fluidity of contemporary Chinese society were born. --P.62
이들 도시의 조계(租界) 구역은 중국인이 통제했건 외국인이 통제했건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근대화된 중국을 창출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통치와 사회적 상호작용의 복잡한 체계를 가진 이들 조계는 오늘날의 중국 사회의 혼종성과 유동성이 탄생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The foreign presence weakened the Qing state by reducing its autonomy, but it also helped preserve it by favoring it against its enemies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To many observers it seemed the perfect exploitative relationship. --P.85
외국의 존재는 청나라의 자율성을 감소시켜 청조를 약화시켰지만, 또한 19세기 후반의 적들에 대항하여 청조를 유리하게 하면서 청조의 보존에 도움을 주었다. 많은 관찰자에게 이는 완벽한 착취적 관계였다.
Japan’s 1895 victory in the war with China meant that China was no longer the center of international affairs in East Asia. It did not, nowever, mean that Japan had replaced it. As the Meiji leaders had feared, the European powers and the United States were intent on preventing domination of a region by one power, and an Asian power at that. --P.109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중국이 더 이상 동아시아에서 국제적 문제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그 지위를 대체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메이지 지도자들이 두려워했듯이 유럽 열강과 미국은 한 지역을 하나의 권력, 그것도 아시아인의 권력(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 <Making China Modern(현대 중국의 탄생, 2019)>
독일 체펠린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인 Klaus Muhlhahn(클라우스 뮐한, 1963~ ) 교수는 중국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이다. 본서는 청나라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 개론서이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세계적 강대국으로 부상에 대해서도 국제적 기회, 역사적 유산의 결과였다고 평가한다.
The rise of China in the late twentieth and early twenty-first century is undoubtedly one of the greatest developments remaking the world we live in. China’s extraordinary and unprecedented economic growth in the recent past, its rapid catch-up in science and technology, and its increasingly robust projection of power on the geopolitical stage are shifting the global balance. --P.1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중국의 부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재구성하는 가장 위대한 발전 중 하나이다. 최근 중국의 놀랍고 전례 없는 경제성장, 과학기술의 급속한 따라잡기, 지정학적 무대에 대한 점점 더 확고한 힘의 투사 등이 세계 균형을 이동시키고 있다.
China’s nineteenth-century descent to the point that it was unable to capitalize on its historical advantages or defend itself against disorder and foreign imperialism was mainly caused by institutional and political failure. --P.12
19세기 중국의 몰락이 역사적 이점을 활용하거나 사회적 혼란과 외국 제국주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지경까지 간 것은 주로 제도적·정치적 실패에 기인한다.
The Qing dynasty ran an empire that in many respects was “modern’(although the term was not used in China before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even before China’s encounter with the ”modern“ West. At its core was a set of efficient institutions that allowed the Qing to promote economy, engage in border-crossing interactions, cede space to local governance, and maintain an imperial bureaucracy of light societal penetration. --P.25
청조는 ‘근대’ 서구와 조우하기 전부터 많은 점에서(비록 이 용어가 19세기 말 전의 중국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근대’적이었던 제국을 운영했다. 청조의 핵심에는 경제를 촉진하고 국경을 넘는 상호작용에 참여하고, 지방 통치를 위한 공간을 양도하고, 가벼운 사회적 침투의 제국 관료제를 유지하게 하는 일련의 효율적 제도가 있었다.
The early Qing period was also one of remarkable stability and continuity as Kangxi(1654-1722) and Qianlong(1711-1799) ruled for roughly sixty years each. During their time on the throne, the empire went through a period celebrated in Chinese histroiography as the “prosperous age”(shengshi). --P.55
청 초기는 각각 60년 동안 통치한 강희제(1654~1735)와 건륭제(1711~1799)에서 보듯이 놀라운 안전성과 연속성의 하나였다. 그들이 재위할 동안 제국은 중국 역사 기록이 ‘번성하는 시대(성세)’라고 찬양한 시기를 거쳤다.
The treaty of Nanjing(August 1842), the first of the so-called unequal treaties, opened China to the West and marked the beginning of a growing western dominance in the nation. According to its term, the Qing had to open Guangzhou and four other ports for direct trade between foreigners and Chinese. --P.94
이른바 불평등조약 중 첫 번째인 난징조약(1842년 8월)은 중국을 서양에 개방하고, 중국에서 성장하는 서구 지배의 시작을 표시했다. 조항에 따라 청은 광저우와 다른 네 항구를 외국인과 중국인 사이의 직접무역을 위해 개방해야 했다.
To understand the causes of China’s downfall more comprehensively, it is useful—in fact, indispensable—to place China in a global framework. China’s crisis in the late Qing period was not unique, but typical of how empires in the nineteenth century were challenged. --P.196
중국이 몰락한 원인을 더욱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면 중국을 세계적인 구조 속에서 두는 것이 유용하고 사실은 필수적이다. 청 말 중국의 위기는 독특한 것이 아니며, 19세기에 제국들이 도전받았던 방식에 전형적인 것이다.
With these events, not only was the Qing dynasty overthrown after nearly 270 years of continuous rule; the entire imperial-dynastic system that had endured for over two thousand years came to its end. --P.226
이러한 사건들로 청조가 거의 270년의 계속된 지배 끝에 전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2000년 넘게 지속된 제국 체제 전체가 종말을 맞았다.
◆ 중국은 부인하고 싶은 ‘청’ 제국의 역사를 편입하고 있다
청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번영한 나라를 만들었다.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115년간이 극성기였다. 그 시기를 강희의 ‘강’과 건륭의 ‘건’을 따서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이처럼 광대한 영토를 확장한 청나라는 중국을 278년간 지배한 이민족이다.
중국공산당(사실 중국을 지배하는 중국은 없고 중국공산당만 있다)은 그 시원을 1911년 신해혁명에 두고 있다. 신해혁명은 청나라의 타도하고 한족을 부흥하자는 혁명이다. 그런데 신해혁명처럼 청나라를 부인하며 청나라가 지배한 만주와 신강을 잃게 된다. 여기에 중국공산당의 딜레마가 있다.
중국공산당은 청나라인 만주족이 한족 외에 55개 소수민족을 다스리면서 번영된 강건성세를 이룬 것에 주목했다. 중화민족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 모두를 가리킨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며,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합치는 역사 공작을 시작했다. 청나라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해야만 만주와 신강을 차지하는 역사적 정당성이 확립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시진핑 주석(主席)은 <청사고(清史稿)>에 머문 청나라 역사의 발간을 서두르고 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청사고>에는 과거의 정사(正史)에는 없던 ‘속국전(屬國傳)’을 만들고, 그 안에 조선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중국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번국(藩國)’이라고 한 후 ‘조선을 속국으로 일컬으니 (명의) 경계 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적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시진핑의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발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중국이 자신들을 지배한 청나라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짓은 모름지기 지구상에서 중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이처럼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발해사와 고구려사를 자신의 역사에 편입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경계하고 시정하도록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청 왕조뿐 아니라 모든 권력의 몰락과 타락은 변화를 주도적으로 받아들여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가장 큰 멸망의 원인은 국제 시류를 따라가지 못한 점이다. 이런 강대한 제국인 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조선 인조 왕의 어리석은 행동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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