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안내】유시경 수필집, 『전선 위의 달빛』

욕망과 결핍, 가여움과 자유, 그리고 시간과 집착에 관한 글들

조용석 기자 승인 2024.10.21 17:11 | 최종 수정 2024.10.21 17:13 의견 0

"글의 힘은 그릇을 닦는 노란 주방세제보다 독한가보다.

그릇에 묻은 비눗물은 여러 번 헹구면 없어지건만,

내 삶의 문장들은 수십 번 헹구어내도 말끔히 닦이지 않으니

이는 나의 능력 부족일 것이다.

수필은 어렵다. 마음을 다잡아 다시 쓰련다.

비눗물처럼 유연해져야겠다"


36년간 식당을 운영하면서 시와 수필 공부를 하고 2010년에 『한국산문』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첫 수필집 『냉면을 주세요』(2015)로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던 유시경 수필가가 8년 만에 두 번째 수필집 『전선 위의 달빛』을 출간했다.

『전선 위의 달빛』은 글의 주제와 소재에 따라 제1장 결핍에 관하여, 제2장 욕망에 관하여, 제3장 가여움에 관하여, 제4장 자유에 관하여, 제5장 시간 그리고 집착에 관하여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제목만 살펴보더라도 어떤 내용의 작품들과 만날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제1장 ‘결핍에 관하여’에는 우주의 블랙홀 같은, 까만 동굴 사진 한 장 속에 자리했던 태아의 집을 화자로 내세워 사랑과 임신, 착상과 낙태, 출산과 완경에 이르기까지의 애환을 수필의 퇴고 과정에 덧대 문학적 상상과 은유로 과감히 풀어낸 「빛의 요람이고 싶었던」. 초등학교 졸업 전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급격하게 나빠진 눈이 성인이 되고는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오십 줄에 들어서서 생긴, 눈앞에 날파리가 날아다니는 듯한 ‘비문증’ 때문에 겪는 답답함을 낱말과 문장에 비유한 「비문이 소용돌이칠 때」 등을 만날 수 있다.

제2장 ‘욕망에 관하여’에는 사실 자신은 두 남자와 살고 있으며, 그 둘은 번갈아가며 자신을 괴롭히지만 그 중 하루에도 몇 번씩 저만 바라봐달라고 투정부리는 ‘작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는 식당에서 함께 일하는 남편이 아닌 작가 자신의 가면 속 실체를 호기롭게 드러내는 수필 「작은 남자」, 가수 양희은의 히트곡 〈한 사람〉의 노랫말을 소재로 어린 시절 일곱 가구 사글셋집의 후미진 골방에 살았던 왜소한 체격의 영이 언니와의 추억을 그리는 「산마루 연가」 등을 읽을 수 있다.

제3장 ‘가여움에 관하여’에는 유시경 작가가 운영한 식당에서 5년간 일하는 내내 일이 고되거나 몸이 아파도 한 번도 병가를 내지 않고 독하게 자리를 지켜주어 조선족에 대한 선입견을 깨게 했던 이야기이다. 월화(月華)가 식당을 그만둔 뒤 10년 만에 역전 국밥집에서 일하는 것을 봤지만, 이내 시선을 피하며 멀어진 그녀의 속내가 궁금했던 표제작 「전선 위의 달빛」은 여러 가지 서사와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한 편의 소설 같은 문제작이다.

제4장 ‘자유에 관하여’에는 코로나에 걸려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했던 아이 때문에 백일 지난 손자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 식당 운영에서 겪어야 할 어려움들을 써내려간 「오! 격리해제」, 36년간 운영하던 식당을 접고 ‘열심히 일한 우리, 떠날까?’라며 후련하게 떠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된 ‘한탄강 물윗길’을 걸었던 일화를 남긴 「성장하는 집」 등이 실려 있다.

제5장 ‘시간 그리고 집착에 대하여’에는 서른 살에 함흥냉면 제조기술을 배웠으나 뜨거운 물에 익반죽하느라 하루도 손이 성한 날이 없는 남편과, 갈빗집의 후식 냉면은 공짜라면서도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하는 손님들과의 하루를 담담히 써내려간 「냉면의 마음」, 식당과 주방은 냄새와 욕망의 집합소라는 명제에 얽힌 이야기 「황홀한 집착」. 음식을 찾아 여러 직종의 손님들이 밖에서 묻혀오는 세상의 냄새와 요리를 만드는 주방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들에 관한 이 수필은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흘려보낸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유시경 수필가는 「작가의 말」에서 “어느 날 문득, 설거지를 하다 물통에 둥둥 뜬 두 손을 보았다. 고무장갑을 끼지 않는 나의 손가락들이 배수구 위로 요동치고 있었다. 칼에 베인 상처. 펜혹처럼 부푼 두 번째 손가락 첫마디를 감추고 싶어 주먹을 쥐고 걸었다. 문학에 빠져 글공부를 했고 그 간절함을 놓지 않으려 어지간히 지탱해왔다. 어느 누가 이르길, 문학의 본질은 결핍과 자유라 했으니 그에 충실히 살았다고 자위한다. 글의 힘은 그릇을 닦는 노란 주방세제보다 독한가보다. 그릇에 묻은 비눗물은 여러 번 헹구면 없어지건만, 내 삶의 문장들은 수십 번 헹구어내도 말끔히 닦이지 않으니 이는 나의 능력 부족일 것이다. 수필은 어렵다. 마음을 다잡아 다시 쓰련다. 비눗물처럼 유연해져야겠다”는 결의를 내비쳤다.


유시경 수필가는

전북 남원에서 출생했다. 군산에서 한약방집 딸로 성장했으며 서울에서 주방장 남편을 만나 수원과 군포에서 식당을 경영했다. 서울 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한국산문』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한국산문』 운영위원이며 『군포시민문학』 편집장,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군포문협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편과 함께 요리책을 준비 중이다. 첫 수필집 『냉면을 주세요』 (2015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를 출간했다.

■ 도서출판 북인 펴냄 / 값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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