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夢路(몽로)

혜범 스님/원주 송정암 주지 승인 2025.01.14 08:00 의견 0

사형을 만나러 가는 길은 몽로(夢路) 같았다. 어릴 적 나는 말이 없었다. 지금도 말이 없지만. 주차장에 차를 대고 국립 요양병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른 언덕배기였다. 길가에 심어놓은 나무들의 이파리는 다 떨어지고 마른 가지만 앙상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형은 새벽에 예불을 하러 나왔다가 법당에서 절을 하다 갑작스레 쓰러졌다 했다. 뇌졸증으로 회복하기는 했는데 하반신을 쓰지 못해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고 했다.

“누구세요?”

“제가 누군지 알아서 뭐 하시게요?”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때 사형은 '아쭈구리!'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좌, 일루 와봐.’하며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다가가 두 팔로 사형을 안았다.

“너 내 쵸코파이 내놔.”

“……네?”

순간,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나는 곤혹스러워 움찔했다.

지금은 불공이나 재를 지낼 때 쵸코파이를 잘 올리지 않지만 옛날에는 쵸코파이가 귀한 먹거리였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시절이 있었다. 절집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불공이나 재가 끝나면 과일이나 과자 그리고 떡 같은 걸 골고루 나누어 사중식구들에게 배분을 했다. 그때 먹거리가 생기면 사형은 내게 그런 것들을 내밀곤 했다.

“야야, 글쎄, 내가 오줌하고 똥을 막 싼다."

정신이 돌아온 사형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부둥켜안은 사형의 팔을 풀었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애틋한 눈으로 사형을 내려다보았다. 오락가락 치매기가 있다는 사형이라지만 나보다 열여덟 살이 위였다.

“너 만한 동생이 있었지. 그런데 죽었어. 그러니 너는 이 정글에서 꼭 살아남아야 해.”

사형의 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귀를 쫑긋거리던 날들이었다. 밤이면 뇌록의 귀신불들이 허공에 나비처럼 떠돌았다. 시도 때도 없이 고라니며 멧돼지들이 출몰하곤 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먼저의 세계를 파괴하고 나온 새.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새.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The bird fights its way out of the egg.

The egg is the world. Who would be born must destroy a world.

The bird flies to God. That God's name is Abraxas. —Max Demian-

“…….”

“니가 어젯밤 노스님 방에서 공부하다, 시험지 위에 써놓았던 문장들을 나도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프락사스가 빛과 어두움의 공존, 선신이면서 동시에 악신인 것처럼 줄탁동시(啐啄同時, 啐啄同时)라 말할 수 있지. 갈매기의 꿈도 마찬가지야.”

너의 눈이 말하는 것은 믿지 마라. 왜냐하면 그것들에는 항상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기에...

애벌레에게는 삶의 끝일 수 있지만, 그것이 나비에게는 삶의 시작일 수 있다.

네가 너의 마음만 바꾸면, 너는 언제라도 다른 미래와 다른 과거를 선택할 수 있다.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지 마라. 왜냐하면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헤어져야 하니까...

나는 세상에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너의 삶 속의 모든 사람이나 사건은 네가 그렇게 놔 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들을 어떻게 할 지는 너의 선택에 달렸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에게는 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먹는 것이 중요하지... 하지만 이 갈매기에게는 먹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나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오늘의 작은 변화가 내일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너에게 주어진 중요한 의무는 너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면, 너의 삶에는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명이 완수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네가 아직 살아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그 안에 너를 위한 선물을 가지고 있다.

높이 나는 갈매기가 더 멀리 볼 수 있다.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이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진정으로 최악의 상황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공간을 초월하는 순간 너에게는 '여기'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초월하는 순간 너에게는 '지금'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스니임……. 그걸 다 어떻게 외워요?”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입산했던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Seagulls flying high can see further. (높이 나는 갈매기가 더 멀리 볼 수 있다.)라는 단 한 문장 밖에 나는 외우지 못했다. 나머지는 다 그림이고 갈매기의 꿈이라는 소설 전문과 다름없었다.

“......저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네가 머무는 곳은 이 세상 어디든 다 너의 집이야. 너의 작은 변화가 내일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거야.”

그랬다. 열네 살. 내 머리 위에서 온갖 산새들이 울었다. 앞산에는 참새도 있었고 박새도 있었으며 곤줄박이도 있었다.

“절깐이 너를 가로막기도 하지만 너를 지켜주기도 할 거야. 그러나 오로지 너를 지킬 수 있는 건 너 뿐이야. 부처님이나 나나 노스님은 너에게 울타리일 뿐인 거고.”

“…….”

사형은 그렇게 말했다. 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다 아내와 아이들이 교통사고로 죽자 절에 들어와 스님이 되었다는 사형을 말로는 도저히 이겨먹을수 없었다.

새벽이면 뒷산에서 휘파람새가 울었고 낮에는 홀딱벗고 새가, 밤이면 부엉이들이 우우 하고 떼지어 울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라고요?”

“존재의 참모습을 보라고. 깨닫는 거지. 너의 변화와 성장을. 네놈의 깨달음과 열반의 과정을, 스스로 느끼란 말이야. 네놈의 삶과 자유. 해방. 그리고 너의 그 거룩함과 그 아름다움을.”

치매병동으로 들어가는 문은 밖에서 안으로는 열렸으나 병동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은 잠겨 있었다. 가지 말라고, 정신이 나간 사형은 쵸코파이를 내놓으라고 했다. 정신이 들자 내가 필요가 없는 인간이 되었다,느니 이 세상에 쓸모 없는 밥벌레, 식충이 인간이 되었다느니 횡설수설 애원을 했다가 나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고 폭로하겠다고 협박을 했다가 기어이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는 거였다.

살았다고 좋아할 것 없고 죽는다고 서러워할 것 없다,던 사형이었다. 한때 잘 나갔던, 찬란했던 봄날을 보내고 오락가락하는 사형을 한참 끌어안고 울먹이다 사형의 거룩하고 아름다움에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반듯하게 서서 합장 배례를 하고 병실을 나왔다.

사형의 문병을 마치고 나오자 찬바람이 더 거세게 불어왔다. 몽로, 꿈속에서 걸어 나오는 기분이 거지같았다. 차키를 돌려 시동을 걸다 그만 나는 또다시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크게 터트리고 말았다.

젠장할, 여기까지 도대체 몇 걸음에 왔던가.

나는 지금 거룩하고 아름다운가.

나는 살아있는가 죽었는가.

또 나는 언제 정신을 놓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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