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대나무는 모두 진여이고, 울창한 국화는 반야 아님이 없다.

동안거를 무사히 마쳤다. 몸조리를 하려고 아침 저녁이면 산보를 하는데 오늘은 아란야를 벗어나려다 걸음을 딱 멈추었다. 작년에 피었던 국화가 말라비틀어진 채 눈 속에서 나를 보는 거였다.

순간, 내가 벗어나야 할 업보도 이루어야 할 공업도 이젠 거의 다 씼겨 나갔군, 하고 군시렁거리다 무정설법이로고, 하며 허튼소리를 내뱉었다.

무정설법이란, 자연이 자연의 모습과 소리가 법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무정은 살아있는 유정과 달리 자연이나 사물을 뜻하고 설법은 가르침이란 뜻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소리나 현상이 마치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말의 원조는 남북조 시대의 도생스님이다.

조금 더 걷노라니 소동파의 오도송이 떠올라 그만 또 걸음을 멈추었다.

시냇물 소리가 곧 오묘한 법문이니

산속 풍광이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밤새 설한 이 팔만사천 게송들을

다른 날 어떻게 다른 이에게 (있는 그대로) 들려줄 수 있으리.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그러나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놓았다. 대주혜해 스님은 이를 긍정하지 않았다.

"법신은 무상無相이나 대나무에 응함으로써 모양을 이루는 것이

고, 반야는 무지無知하나 국화에 응하여 모양을 드러낸 것이므로,

저 국화와 대나무는 반야나 법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경

에 이르기를, '부처의 참법신이 마치 허공과 같아, 사물에 응하여

모양을 나타냄이 물속의 달과 같다.' 한 것이다. 국화가 만약 반

야라면 반야가 곧 무정과 같고, 대나무가 만약 법신이라면 대나무

또한 작용에 응할 수 있다."

헛것인가,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거늘.

물 흐르는 소리,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소리, 새들의 지저귐. 소리 신통방통한 모양의 단순함을 넘어 설법이라 비유하는 것이다. 색이 공 되고 공이 색이 되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경계다.

사람, 초목조수어충 유정에 취해 하늘 허공 땅, 산 바다 별, 무정을 보지 못했던가. 봄인데, 아아 경칩인데. 자연이 오는 봄이 펼쳐놓은 경전을 하염없이 둘러보는데, 아아 업인데. 진여인데. 생수불이(生修不二)이거늘, 하며 봄이 오는 소리를 보며 개울가에 한참이나 앉아있었다. 그러자 흘러가던 개울물이 휙 돌아서서 <네가 바로 부처다.>하고 혓바닥을 쏙 빼물고 용용 죽겠지? 하며 멀리 멀리 달아나고 있는 거였다.